고통스러운 진실 앞에 선 이들.. 연극 '그을린 사랑'

박성준 2021. 5. 30.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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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무대에서 만들어진 중력은 객석을 짓누른다.

맨 뒤편이 보일 정도로 모든 걸 걷어낸 먹색 무대에서 뿜어나오는 어둠에 맞서는 건 어머니와 쌍둥이 남매, 그리고 한 남자다.

너른 무대에서 시선을 외면한 채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선 이 비극의 네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일그러진 사각 구도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객석에 전달한다.

이후 무대에선 나왈의 과거와 쌍둥이의 현재가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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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화염에 그을린 이들의 비극적 운명과 충격적 진실을 전하는 연극 ‘그을린 사랑’. 전쟁, 난민, 억압, 폭력 등 한 여인의 힘겨운 삶 속에 묻혀있던 참담한 사건들과 그 결과로 빚어진 가혹한 운명을 버텨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고통과 화해, 인간의 의지와 저항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LG아트센터 제공
참혹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무대에서 만들어진 중력은 객석을 짓누른다. 맨 뒤편이 보일 정도로 모든 걸 걷어낸 먹색 무대에서 뿜어나오는 어둠에 맞서는 건 어머니와 쌍둥이 남매, 그리고 한 남자다. 너른 무대에서 시선을 외면한 채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선 이 비극의 네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일그러진 사각 구도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객석에 전달한다. 어찌 살 것인가.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이 던져진다.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 겸 연출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을 신유청 연출이 새롭게 만든 연극 ‘그을린 사랑’. 2016년 초연 때부터 충격적 전개와 깊은 감동으로 평단과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고통스러워 두 번 보기는 힘든 작품’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그 네 번째 공연이 5월 25일부터 30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캐나다에서 아마추어 복서와 수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평범한 삶을 살던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자신들을 버리고 침묵의 세계로 7년 전 홀로 떠난 모친 나왈이 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끊이지 않는 ‘전쟁의 땅’ 중동 출신인 나왈은 두 통의 편지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그리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장남에게 잔느와 시몽이 각각 전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모르는 게 약, 잊고 살겠다’는 시몽과 달리 잔느는 뿌리를 찾기 위해 중동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후 무대에선 나왈의 과거와 쌍둥이의 현재가 교차한다. “읽고 쓰고 배워야 한다”는 할머니 유언에 마을에서 처음으로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된 나왈. 하지만 종족 분쟁에 애인도 아들도 빼앗긴다. 피가 피를 부르는 아수라장으로 아들을 찾아 나선 나왈이 마주치는 건 참혹한 전쟁의 비극이다. 그리고 나왈이 걸었던 가시밭길을 거슬러 올라간 잔느는 고통스런 진실 앞에 선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잃어버린 첫째 아이는 누구인가.

‘그을린 사랑’은 여러모로 자신의 출생에 얽힌 참혹한 비밀을 풀어나갔던 테베 왕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비슷하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눈을 찌른 채 무너지며 나왈은 침묵을 택하고 하늘을 등진 채 땅에 묻힌다.

하지만 두 작품 결말이 남기는 여운은 사뭇 다르다. 인생 팔자를 되새김질하며 맛보는 씁쓸함 대신 고통을 넘어서는 사랑의 위대함이 찾아온다. 나왈처럼 진실 앞에 선 잔느와 시몽, 그리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들을 구하는 건 나왈이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온 나왈은 죽기 전 남긴 말과 글로 “이제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어”라고 가족을 다독인다. 고통으로 가득 찬 비극의 주인공이 오랜 침묵 속에서 끌어올린 위로는 믿기 힘든 감정의 지고한 순화,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이를 두고 신유청 연출은 ‘고난의 유익’을 말한다. “고통 속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그 너머 태양은 언제나 있다. 이번 공연에는 그런 역설적인 삶의 신비를 그려보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공연 시간은 1막 90분, 2막 120분. 중간 휴식까지 더하면 3시간 45분에 달하지만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배우들 연기와 뒤로 갈수록 몰입되는 이야기는 시간을 잊게 한다. 그중에서도 나왈을 맡은 이지영의 증언 장면이 인상적이다. 니하드를 맡은 백석광의 무대 위 존재감도 대단하다. 첫 등장부터 뿜어내는 에너지가 출중하다. 여러 작품에서 활약하며 한결같이 무대를 지키고 있는 노배우 남명렬이 유언을 전달하는 공증인 에르밀과 노인 말락 역을 맡았는데 비극의 시작을 잔느에게 말락이 알려주는 장면에선 ‘현기(玄機)’가 느껴졌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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