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학교까지 찾아가 빚 독촉..보다 못해 '엄마' 되기로 했다
학교까지 찾아와 1200만원 빚 독촉.. 보다못한 그룹홈 운영자, 엄마 자처
법정후견인 돼 상속포기 신청 절차
서울에서 그룹홈을 운영하는 김영화 씨(58)는 지난달 15일 규영이(가명·12)의 엄마가 됐다. 3월 22일 법정후견인을 신청해 정식 보호자 자격을 얻었다. 규영이를 괴롭히는 빚의 사슬을 끊어주기 위해. 규영이는 지난해 12월 29일 혼자가 됐다. 아빠가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다섯 살 때 떠난 엄마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규영이는 올해 3월 5일 김 씨의 그룹홈에 합류했다. 겨우 안식처를 얻었지만 규영이는 빚의 망령에 쫓기고 있었다. 아빠 빈소에서도 빚 독촉을 했던 채권자는 규영이의 초등학교까지 찾아왔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1200만 원을 내 놓으라”고 다그쳤다. 결국 보다 못한 김 씨가 나섰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의 도움을 받아 법정후견인부터 맡았다. 후견인이 되면 빚 조사부터 상속포기 신청까지 대신 할 수 있다. 센터도 법적 절차를 무료로 대리하기로 했다. 이상훈 센터장은 “기댈 곳 없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말했다.
후견인 자처해 빚 독촉 막고, ‘빚 대물림’ 차단 무료 법률지원도
서울의 한 공동육아시설(그룹홈) 시설장인 김영화 씨(58)는 3월 11일 전화 한 통을 받고 손이 덜덜 떨렸다. “규영이(가명) 아비한테 돈 빌려준 사람이다. 아빠가 죽었으니 애가 갚아야 한다. 어떻게든 받아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규영이가 그룹홈에 온 지 딱 1주일 만이었다.
○ “어른은 아이의 불행을 외면해선 안 돼”
김 씨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규영이를 다독이며 그간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그 ‘아저씨’는 지난해 12월 아빠의 장례식장에도 나타나 대뜸 빚을 갚으라고 했단다. 며칠 전엔 학교까지 찾아와선 협박했다. 규영이는 그때마다 영문도 모른 채 당하기만 했다.
“여기 온 지 겨우 일주일 된 애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알아보니 규영이를 잠깐 보호했던 먼 친척을 괴롭혔던 모양이에요. 그걸 생각하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맡아줄 이도 없이 홀로 남겨진 아이가 아버지 재산이 얼마인지, 빚이 얼마인지 뭘 알겠어요. 어른이 나서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 입장은 무시한 채 어디든 들이닥치는 채권자를 막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김 씨는 큰 고민 없이 진짜 보호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관련법을 알아본 뒤 3월 22일 곧장 규영이의 법정후견인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달 15일 법원으로부터 인용 결정을 받았다.
“당장은 빚 독촉장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 지켜주지 않으면 규영이는 성인이 된 뒤에도 빚의 굴레에서 시달릴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엄마’가 돼주기로 한 이상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사실 규영이는 처음 그룹홈에 왔을 때 거의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최근 하굣길에 규영이는 마중 나온 김 씨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기도했어요, 저에게 더 많은 용기를 달라고.”
○ 주택상담사가 빚 독촉장 발견해 도와
일곱 살 유민이(가명)는 아직 미성년인 형과 누나가 있다. 삼남매는 지난해 뜻도 제대로 모르는 ‘빚’의 수렁에 빠질 뻔했다. 그들을 구한 건 한 구청 직원의 세심한 눈 덕분이었다.
지난해 6월 유민이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대부업체로부터 빌린 약 15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엄마는 삼남매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이혼한 상태라 법적 책임이 없었다. 빚은 아이들에게 대물림됐다.
법정대리인인 엄마가 해결하면 될 문제였지만 안타깝게도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경계성 지적장애를 지닌 엄마는 법원 서류가 날아와도 그저 방구석에 쌓아만 뒀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꼼짝없이 신용불량자가 될 처지였다.
다행히 지난해 8월 삼남매의 반지하방을 찾은 윤정선 상담사(48)가 이 서류를 발견했다. 구청 주거복지센터에서 일하는 그는 임대주택 상담차 방문한 것으로 이쪽 분야에 밝지 못했다. 자신이 책임질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윤 상담사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게 무슨 서류냐고 물었더니 고개만 가로저었어요. 읽어봤더니 이대로 두면 아이들한테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당장 법률지원단체에 요청해 관련 서류들을 준비해줬어요. 근데 엄마는 ‘너무 어렵다.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그때마다 같이 가자고, 내가 다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잡아끌었어요.”
이소연 always99@donga.com·조응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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