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학자 이름 딴 유럽 교류 프로그램 '에라스무스'

임대훈 2021. 5. 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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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교류의 상징이 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유럽 통합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

다양성과 포용성으로 무장된 새로운 세대 양성

미국의 석학 제레미 리프킨은 2004년 미국의 아메리칸드림과 그 경향성을 비판하고, 유럽이 지향하는 길을 세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는 책 ‘유러피안 드림(The European Dream)’을 발간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이 책의 첫 장에는 ‘아내와 유럽의 에라스무스 세대를 위하여’라는 말이 적혀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 신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이름을 딴 이 세대는 과연 어떤 세대이길래 제레미 리프킨은 이들을 위하여 글을 썼다고 한 걸까?

먼저, 에라스무스는 세계주의자이면서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5~16세기에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활동했고, ‘우신예찬’, ‘대화집’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글은 뛰어난 학구적 성과를 남겼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 최대항 로테르담의 상징 에라스무스 다리 ©연합뉴스

바로 그의 세계주의자적 면모와 학문적 명성, 도전 정신에 착안하여 유럽은 1987년 유럽 대학 내 교류와 다양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의 유럽 학생 교환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이 프로그램의 정식명칭은 ‘대학생들의 유동성을 위한 유럽 지역 행동 계획(European Region Action Scheme for the Mobility of University Students)’이다.

현재는 유럽연합(EU)에 속해있는 국가의 대학 뿐 아니라 영국,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터키 등의 유럽연합에 속하지 않는 국가와 유럽 인접 국가에서도 프로그램을 통해 수학할 수 있을 정도로 예산과 규모도 커졌고, 교환학생을 비롯해 타국에서 온 학생을 ‘에라스무스’라고 지칭할 정도로 유럽 학생 교류의 상징적인 프로그램이 되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순항한 것은 아니었다. 시행 초창기에는 자체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교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던 국가들의 반발도 있었고, 예산과 그 적절성을 두고 시비가 일어난 적도 있다.

그러나 첫 해 3,244명으로 시작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꾸준히 성장해 2006년에는 유럽 학생 인구의 1%에 해당하는 15만 명이 참가했고, 현재는 매년 5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다. 유럽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 참가한 누적 학생 수는 천만 명이 넘는다.

유럽연합의 초석이 됐다고 평가받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의 성공은 사실 유럽연합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1999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유럽의 교육부 장관들이 모여 성사된 ‘볼로냐협정’으로 유럽 대학 간 학제가 단일화되었고, 그로 인해 학점 교류도 수월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실로 현재 유럽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의 대학에서 수학한 후 학점을 인정받는 것이 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유럽 연합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집행위원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7년까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 배정된 예산만 262억 유로이다. 이는 2014-2020년 기간 동안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 지출된 예산 147억 유로와 비교해 봤을 때 2배 가량 늘어난 금액이다. 집행위원회는 2021-2027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단순 학업 지원을 넘어 유럽 내 직업 훈련과 스포츠 교류도 지원하며, 사회적 포용성과 그린 및 디지털 전환, 민주주의를 위한 젊은 유럽인의 참가에 주안점을 두겠다고 공표했다.

집행위원회는 또한 기금을 조성해 교류 학생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한다. 보조금은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노르웨이, 덴마크와 같은 북유럽과 영국처럼 물가가 비싼 국가에서 수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최대 월 360유로(일일 12유로)를 지원하고,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10개국에는 최대 월 300유로(일일 10유로),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체코,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와 터키에는 월 240유로(일일 8유로)를 지원한다.

최장 1년 동안 원하는 국가에서 수학하며 학점도 인정받을 수 있고, 지원금까지 제공되다 보니 유럽 대학생들에게 에라스무스는 유럽 대학 생활의 꽃으로 불린다. 프랑스인으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해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던 마리옹(Marion, 27)은 “암스테르담 정착을 결정하는 데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유럽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이며, 평상시에는 깨닫기 힘든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것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실제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유럽 통합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행위원회가 2010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에라스무스를 경험한 학생들은 그전보다 자신을 유럽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학생들의 에라스무스를 통한 경험과 문화적 교류는 작품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L’Auberge Espagnole)’이다. 이 작품에서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각국의 에라스무스 학생들로 나온다. 아일랜드 작가 샐리 루니(Sally Rooney)가 쓴 소설 ‘노멀 피플(Normal People)’은 에라스무스가 문학 작품에 스며든 또 다른 예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스테판 볼프(Stefan Wolff)는 앞으로 유럽의 미래는 다양성을 포용하고 유럽이라는 사회적 연대감으로 무장된 리더에 의해 이끌어질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들을 ‘에라스무스 세대’라고 칭했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한 바로 그들이다.

2021년 유럽은 그들의 예측이 현실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전 벨기에 총리이자 현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인 샤를 미셸은 과거 스스로를 “통합된 유럽의 혜택을 받은 에라스무스 세대”라고 지칭했다. 그 역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다.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터 총리, 오스트리아의 쿠르츠 총리,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등 현재 많은 유럽의 지도자들은 젊은 에라스무스 세대 지도자들이다. 30여 년 전 시행된 에라스무스가 유럽의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내고 지도자들을 키워낸 것이다.



◆전 벨기에 총리, 현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샤를 미셸 ©연합뉴스

현재 유럽의 미래는 마냥 밝지만은 않다. 유럽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다른 대륙보다 더 많이 신음했고, 금융 위기의 여파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지도자들은 다른 대륙의 지도자들보다 젊고 포용적이고 다양하다. 그들은 세계 보편적 인권을 이야기하고, 환경을 중시하며 지구촌 이슈에 대해 적극적이다. 에라스무스 세대라 불리는 이 젊은 유럽의 지도자들이 만들어 낼 새로운 미래가 기대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임대훈 글로벌 리포터 rentalhun@naver.com

■ 필자 소개

암스테르담 대학교 경제학과

암스테르담 한글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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