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스트리트] 육조거리

파이낸셜뉴스 2021. 5. 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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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광화문광장과 세종대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무엇보다 세종로, 광화문광장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전에 육조대로, 육조거리라는 본명을 찾아주는 게 도리였다.

최근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새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흔적 등 유구가 무더기 발굴됐다.

광화문광장에 옛 육조거리를 복원·재현하고, 육조대로라는 옛 이름도 원상회복시켜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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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조성 과정에서 문화재 발굴 조사로 드러난 조선시대 육조거리 흔적 등을 일반인에게 공개 중이다. 김범석 기자
지금의 광화문광장과 세종대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공식문서에 등장하는 길 이름은 육조대로와 운종가(종로의 옛 이름) 단 두개뿐이다. 왕의 행차길이었다. 왕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나서 육조대로와 운종가 그리고 광통교를 거쳐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나아갔다.

백성들은 육조(이·호·예·병·형·공)가 있다고 해서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고 호칭하길 즐겼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육조는 물론 의정부, 삼군부,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위계에 따라 좌우에 줄지어 있었다. 솟을대문과 담벼락의 행렬은 '육조장랑'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육조대로엔 광장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국가의례나 행사, 집회가 열린 국가의 중심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보기 힘든 폭 58m, 길이 200m의 장엄한 광장이었다. 식민통치기간 중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를 지은 뒤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로 옮겨 버렸다.

또 육조장랑을 뜯고, 행정지명은 광화문통, 거리이름은 총독부 광장으로 억지 개칭했다. 광화문사거리 황토마루(황토현)를 뭉개고 신작로 태평로를 뚫었다. 해방 후 미 군정청이 총독부에 입주하면서 군정청 앞, 정부수립 후 중앙청 앞이라는 가명을 전전했다. 무엇보다 세종로, 광화문광장이라고 이름을 붙이기 전에 육조대로, 육조거리라는 본명을 찾아주는 게 도리였다.

광화문광장은 2009년 당시 오세훈 시장 때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박원순 전 시장이 2016년 재구조화에 도전했다가 완성을 보지 못했다. 최근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새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흔적 등 유구가 무더기 발굴됐다. 조선 600년의 향기가 광화문광장 아스팔트 아래에서 숨쉬고 있었다. 2003년 청계고가를 철거하자 청계천이 우리를 맞은 것처럼 살아 있었다. 광화문광장에 옛 육조거리를 복원·재현하고, 육조대로라는 옛 이름도 원상회복시켜야 할 시간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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