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전자랜드를 사랑했던 남자, 이현호

손동환 2021. 5. 2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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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4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이름은 많이 언급되지만, 막상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사람이 있다. 내 옆에 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막상 내 옆에 없는 사람이 있다.
이현호(전 인천 전자랜드)도 그 중 하나다. 지금도 전자랜드하면 이현호를 떠올리지만, 이현호는 전자랜드에 없다. 늘 농구 코트에 있을 것 같은 이현호였지만, 이현호는 지금 농구 코트에 없다.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 있을 것 같은 이현호지만, 이현호는 그 곳에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현호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현호를 농구 코트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유와 이현호의 여전한 전자랜드 사랑을 이번 기사에 담으려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인터뷰는 3월 18일 오전 10시에 이뤄졌다)

INTRO
개인 통산 평균 17분 1초 소화. 3.9점 2.5리바운드. 이현호의 기록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뷔 후 은퇴까지 552경기에 나섰다.
이현호가 많은 경기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 화려하지 않아도, 팀을 위해 몸을 던질 줄 아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현호의 희생은 기록 이상의 가치였고, 이현호의 헌신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기록 외적인 가치가 큰 선수였고,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팬들 역시 이현호의 이타적이고 열정적인 플레이에 환호했다. 이현호의 시작이 미약했을지라도, 이현호의 마지막이 성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덕분에, 이현호는 홈 팬들 앞에서 은퇴 경기를 할 수 있었고, 홈 팬들과 후배들의 박수 속에 코트를 떠날 수 있었다.

2003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8순위로 서울 삼성에 입단했습니다. KBL에 입성한 순위는 낮았지만, KBL 최초로 2라운드 출신 신인왕을 차지했습니다.
잘하는 동기들이 부상으로 다쳤어요. 신인왕에 필요한 출전 경기 수를 못 채웠죠. 게다가 (서)장훈이형이 다치면서, 저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오래 전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운으로 받은 신인상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2005~2006 종료 후 안양 KT&G(현 안양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첫 트레이드였는데요.
신인상을 받고, 다음 해에 (이)규섭이형(현 서울 삼성 코치)이 왔어요. 제가 2년 동안 경기를 거의 못 뛰었죠. 앞으로도 뛰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좌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때문에, 대표팀 차출이 있었어요. (서)장훈이형과 규섭이형이 대표팀으로 차출됐고, 안준호 감독님께서 저에게 기회를 살려보라고 하셨죠. 저 역시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고요.
그렇지만 저희가 2005~2006 시즌에 우승을 해서, 샐러리캡이 넘쳤어요. 누구 한 명은 트레이드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선수들도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어요.
당시 서동철 코치님(현 부산 kt 감독)께서 ‘너는 절대 안 보낸다. 그러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잡아주셨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2년 동안 운동도 열심히 안 하고 방황했거든요. 저 스스로도 삼성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2006년 9월에 일본 전지훈련을 하다가 KT&G로 트레이드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전지훈련 끝나기 하루인가 이틀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당시 KT&G는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었고, 저는 KT&G가 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렸어요.(웃음)
KT&G에 가도, 문제가 있었어요. 대표팀 차출이 한 명도 없어서, 출전 기회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열심히 한 게 아까워서, 준비해오던 대로 열심히 했죠.
다행히 김상식 감독대행께서 기회를 정말 많이 주셨어요. 제가 파울 아웃을 당하지 않는 이상 교체를 하지 않으셨고, 제가 뛰고 싶은 만큼 뛰게 해주셨어요. 저를 농구선수 이현호로 만들어주신 첫 번째 은인이었죠.
김상식 감독대행과 계속 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유도훈 감독님(현 인천 전자랜드 감독)께서 올스타 브레이크 때 부임하셨거든요.(유도훈 감독은 2007~2008 시즌 중반에 부임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또 절망했어요. 기회를 못 받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죠.(“국가대표급 레벨의 선수가 아니라면, 모두가 그런 걱정을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유도훈 감독님께서도 저를 예쁘게 봐주셨어요. 조언도 많이 해주셨어요. ‘지금 너 신장에 지금 플레이 스타일로는 프로 생활을 오래 못한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유도훈 감독님께서 오시고 나서, 제가 공격의 1옵션을 맡아보기도 하고 여러 포지션도 소화했어요. 문경은 감독님(현 서울 SK 기술자문)-(우)지원이형(전 울산 현대모비스)-(추)승균이형(현 SPOTV 해설위원) 등 3번 라인과 맞대결하게 해주셨고, 저는 그 선수들에게 포스트업과 외곽 플레이 등 여러 가지 옵션으로 공격을 할 수 있었어요. 유도훈 감독님께서 저에게 달라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셨던 거죠.
2009~2010 시즌 중반에는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어쨌든 KT&G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이상범 감독님(현 원주 DB 감독)께서 리빌딩을 하셨고, 제가 (은)희석이형(현 연세대학교 감독)과 팀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제가 비록 팀의 중고참이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았어요. 제가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게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저는 KT&G가 좋았어요. KT&G만의 뭉치는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그 분위기가 너무 좋고 편했죠.
하지만 전자랜드로 가게 됐어요. 전자랜드에는 넘볼 수 없는 산 같은 장훈이형이 있었고(웃음), 외국 선수도 있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을 또 했죠.
그렇지만 그게 신의 한수가 됐어요. 제가 만약 KT&G에 계속 있었다면 (오)세근이(현 안양 KGC인삼공사)랑 한 팀이 됐을 거고, 세근이와 경쟁했다면 또 밀려났을 거에요.
또, 전자랜드에 간 후, 유도훈 감독님께서 이전처럼 포지션을 계속 바꿔주셨어요. 1번 빼고는 다 했던 것 같아요. 어떤 날은 가드 1명에 저-태종이형-장훈이형-허버트 힐이 뛸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는 열심히 수비하고, 바깥에 서있기만 하면 됐어요. 정말 편했죠.(웃음)
사실 저는 전자랜드에서 진정한 농구선수가 된 것 같아요. 유도훈 감독님의 힘이 컸죠. 진정한 은인이에요. 혼도 많이 나고, 제가 땡깡도 많이 부렸어요. 저와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분이죠.(웃음)
2016년 2월 21일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를 상대로 은퇴 경기를 했습니다. 경기 종료 0.6초 전 레이업으로 마지막 득점을 한 게 기억이 나는데요.
제가 마음만 먹었다면, 전자랜드에서 계속 뛸 수 있었을 거에요. 감독님께서는 저에게 코치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선수로서 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제가 만약에 (오)용준이(부산 kt)처럼 선수 생활 의지가 있고 몸이 됐다면, 지금도 뛰고 있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무릎 내측 인대가 2015~2016 시즌에만 3번이 끊어졌어요. 무릎 내측 인대는 수술을 거의 안 하는데, 수술을 해야 할 정도였죠. 재활만 6개월 정도 걸린다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감독님께 한계가 온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죠.
은퇴를 결심했고, 은퇴 경기를 하기 전 날에 관중석을 처음 가봤어요. 아무도 없는 관중석이었지만, 관중석에서 코트를 보고 싶더라고요. 그 때 마음의 정리를 어느 정도 했죠.
그리고 은퇴 경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뛰는데도, 무릎이 흔들리더라고요. (함)지훈이도 그걸 알았고, 모세의 기적처럼 저에게 득점하는 길이 열렸죠.(웃음) 후배들에게 고마웠어요. 또, 무릎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모든 아쉬움을 털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반가워하는 코치 제의, 이현호는 거절했다
대부분의 운동 선수가 은퇴 후 지도자를 꿈꾼다. 평생 해왔던 게 운동이라, 운동 외의 진로를 선택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자로 가는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는 것만큼 어렵다. 지도자를 원하는 이는 많지만, 지도자의 수요는 너무나 한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현호는 마음만 먹으면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온 코치 제의를 거절했다.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현호에게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지도자 생활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이현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랜드에서 코치 제의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절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제가 선수로서 더 뛸 수 있는데, 못 뛴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후배들에게 밀릴 마음이 없었는데, 몸이 안 따라줘서 은퇴해야 한다는 게 싫었어요.
또, 제가 14년 정도 프로 선수 생활을 했는데, 그 기간 동안 매번 똑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일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감독님의 코치 제안을 1년씩 미루게 됐고, 그게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은퇴 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나요?
원래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있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어쩌다 시작하게 된 사업을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아버님의 사업을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미국으로 못 가게 하려고, 저한테 형 회사에 있으라고 했어요. 형 회사에서 잠시 일했을 뿐이고, 아버지 사업은 형이 물려받았어요.
저는 지금 배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형과 배타는 걸 좋아하고, 선수 시절에도 배를 많이 탔거든요. 당시에는 형이 배를 수입을 해줘서, 제가 배를 탈 수 있었죠.
제가 배를 타는 걸 보고, 주변에서 ‘어떻게 하면 배를 살 수 있냐?’고 문의가 왔어요. 문의사항을 조금씩 해결하면서 시작한 사업이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사업도 사업이지만, 가족도 코치 제의를 거절한 이유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선수는 뛰기만 하면 됩니다. 내 것만 잘 준비하면 되고요. 그러나 코치는 선수들을 챙겨야 해요. 잘하는 선수와 못하는 선수, 많이 뛴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를 모두 챙겨야 해요. 그러다 보면 24시간이 부족해요.
(코치를) 할 거면, 유도훈 감독님한테 진정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코치로서도 능력이 있다는 걸 인정받고 싶었고요. 그렇지만 그 정도로 열정을 보일 자신이 없었어요. 저 혼자 뛰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코치는 가족의 배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쁘게 말하면, 가족을 조금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남들은 미쳤다고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에게 첫 번째는 가족이에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코치 제의를 포기하게 됐죠.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많죠.(웃음) 감독님께서도 전화를 계속 주셨어요. 그 때마다 감독님한테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고 했어요. 감독님께서도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을 아셨을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이제는 코치를 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났어요. 농구를 보는 감각도 잃었고, 저 좋자고 지금 코치를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또, 지금은 제가 하는 사업을 책임져야 해요. 고객에게 약속을 지켜야 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코치를 하게 되면, 고객을 배신하는 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이 된 전자랜드, 이현호의 마음은?
인천 전자랜드는 2020~2021 시즌을 끝으로 구단 운영을 종료하기로 했다. KBL과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도 지난 3월 2일 전자랜드 농구단 매각에 관한 입찰 의향서 접수를 마감했다.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 새겨진 전자랜드 마크는 2020~2021 시즌 종료 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을 포함한 전자랜드 선수단 모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코트에 나서고 있다.
2009~2010 시즌 중반부터 은퇴할 때까지 전자랜드에서 뛰었던 이현호도 전자랜드의 매각 소식을 접했다. 전자랜드에서 많은 걸 이뤘고 전자랜드와 많은 정을 쌓았기에, 전자랜드의 마지막은 이현호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전자랜드가 마지막 시즌을 치르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자랜드가) 운영을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고요. 하지만 기업의 입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자랜드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걸까요?
많은 분들께서 전자랜드하면 ‘졌잘싸’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저는 ‘졌잘싸’라는 단어가 제일 싫었습니다.(웃음) 플레이오프에서 지고 시즌을 마칠 때마다 너무 힘들었거든요. ‘왜 그 때 그랬을까?’라고 후회하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제가 은퇴하고 나서, 전자랜드가 챔프전에 진출했습니다.(2018~2019 시즌) 그 때 아이들을 데리고 울산으로 갔어요. 전자랜드를 응원하겠다고요.
2차전까지 1-1로 호각세를 이뤘고, 3차전도 이기고 있었어요. 하지만 3차전을 놓치면서 흐름이 넘어갔죠. 우승할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어요.
비슷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전자랜드에 있으면서 가장 기뻤던 일과 가장 슬픈 일은 어떤 거였나요?
전자랜드 회장님께서 제가 영입되는 걸 반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참이 됐을 때, 회장님께서 어느 날 모든 선수들 앞에서 ‘(이)현호형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농구 선수로서는 똑바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죠.(웃음) 회장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저를 좋게 봐주시기도 했고요.
그리고 선수 생활하면서 슬펐던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순간이 기뻤으니까요. 다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전자랜드가 2018~2019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할 기회를 놓친 거랑 전자랜드가 매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슬펐어요. 너무 슬펐어요.
전자랜드는 이현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전자랜드라는 기업이 운영하는 구단은 맞지만, 전자랜드 회장님이 운영하는 구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사무국에 전화해서 ‘선수들 아픈 데는 없냐? 선수들이 먹고 싶어하는 건 없냐?’고 할 정도로 선수단을 챙기셨어요. 열심히 하는 선수들을 보면 조용히 불러서 용돈도 주시고, 다친 선수들에게는 약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회장님 본인은 삼겹살을 드시더라도, 선수들에게는 소고기를 사주실 분이세요. 선수들에게 늘 ‘기 죽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고, 선수단 복지도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그 정도로 저희 선수들에게 애정이 남다른 분이세요.
저한테도 용돈을 주시면서 편지를 항상 써주셨어요. ‘늘 고생 많다. 힘내라’고요.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전자랜드라는 이름의 의미 자체도 크지만, 회장님께서 챙겨주셨던 게 먼저 기억이 나요.
또, 제 머리 속에는 ‘삼산월드체육관하면 전자랜드’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만약에 다른 기업이 들어온다면, 제가 삼산월드체육관을 못갈 것 같아요. 또, 팀원들이 바뀌게 된다면, 제가 그 팀을 보러 가진 않을 것 같아요. 저에게 전자랜드는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저보다는 지금 전자랜드에 있는 선수들에게...”
이현호는 현재 농구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농구와 많이 멀어졌다.
그러나 팬들의 함성과 농구 코트의 열기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과 함께 울고 웃었던 후배들 역시 이현호에게 진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현호는 자신보다 후배 선수들을 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는 지금 전자랜드 선수들에게 많은 애정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전자랜드의 진정한 팬으로서, 전자랜드 후배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농구에서 벗어난 일상을 사는 것 같습니다.
주희정 감독님께서 계신 곳이자 제 모교인 고려대에서 후배 선수들을 몇 번 봐주기는 했어요. 그리고 전자랜드에서 자매 결연을 맺은 고등학교에 일일 교사로 나가기도 했고요. 그것 외에는 농구와 관련된 일을 전혀 안한 것 같아요.
그래도 농구는 보실 것 같은데요.
보기는 하지만, 보는 횟수가 점점 줄고 있어요. 많이 바빠서...(웃음) 그리고 ‘코로나 19’ 때문에 제한된 관중으로 경기를 하고 있잖아요. 보고 있어도 흥이 안 나요.
모든 사람들이 원하겠지만, 저 역시 ‘코로나 19’ 이전으로 돌아가면 좋겠어요. 관중 없이 농구한다는 건...
예를 들어, 제가 아파서 뛸 수 없는 몸이에요. 그런데 팬들이 있으면 뛰어져요. 팬들께서 ‘괜찮아’라고 하거나 제 이름을 외쳐주시면, 저는 아파도 뛸 수 있어요. 다음 경기에 못 뛸 상황이어도, 그 순간만큼은 뛰어져요. 그 정도로, 팬들이 가진 힘은 커요.
지금 뛰는 선수들이 팬을 그리워하는 이유겠군요.
팬이 없는 프로 스포츠는 프로 스포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또, 팬 없이 뛰는 프로 선수는 프로 선수가 아니라고 봐요. 그저 자기 건강을 위해 뛰는 거라는 생각 밖에 안 들어요.
승부 속에 각본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게 스포츠잖아요. 그런데 드라마를 현장에서 보는 사람이 제한된다면, 그냥 받아쓰기하는 느낌 밖에 안될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은퇴한 직후에는 ‘내가 없는데...’ 혹은 ‘나 없이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은퇴하고 1년 지나니까, 그 마음이 바로 없어지더라고요.(웃음)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 남아있는 선수들을 더 응원하게 됐어요.
아무래도 전자랜드에서 같이 뛰었던 후배들을 더 응원하게 됩니다. (정)효근이, (차)바위(이상 인천 전자랜드), (김)지완이, (김)상규(이상 전주 KCC) 등 제가 고참일 때 어렸던 선수들이 많이 떠올라요. 다들 너무 잘 하고 있잖아요. 어디에 가서든 누구를 만나든 ‘쟤네가 내 동생이야’라고 자랑을 해요.(웃음)
후배들이 잘하고 있지만 바라는 게 있어요. 먼저 오래 뛸 수 있게 몸 관리를 잘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금보다 더 잘하게 되면, 목에 힘을 빼면 좋겠어요.(웃음)
잘 한다고 해서, 잘 났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사회에 나와 보니, 잘난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저도 은퇴하고 나서 ‘내가 그래도 잘났었는데...’라는 마음을 가졌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까 저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후배들도 잘할 때 고개를 더 숙일 줄 알면, 지금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주장이 된 정영삼 선수에게도 한 마디 하신다면?
저와 비슷하게 꼴통 기질이 있는 선수에요.(웃음) 너무 멋있는 선수이기도 하고요. 노장 소리 듣지 말고, 몸 관리 잘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3년만 더 뛰면 좋겠어요.(웃음) 삼성에 있는 (김)동욱이보다 두 달은 더 뛰어줬으면 좋겠어요. 동욱이보다 더 뛸 마음으로 선수 생활을 했으면 해요.(웃음)
물론, 은퇴할 때 은퇴해야 하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 어디가 끊어지지 않는 이상, 뛰는 게 좋아요.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조금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들면, 뛰었으면 좋겠어요.
이현호 선수를 보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 분들에게 마지막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은퇴한 지 오래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한테 잊혀졌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계시다면, 기억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남은 사랑이 있으시다면, 저보다 지금 전자랜드에 있는 선수들에게 그 사랑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
또, 혹여나 길에서 저를 보신다면, 아는 척 좀 해주세요.(웃음) 가끔 그런 일이 생기면, 저도 희열을 느끼거든요. 저를 보고 긴가민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면 덥석 아는 체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제공 = KBL, 이현호
바스켓코리아 / 손동환 기자 sdh2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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