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전력 묶어 필요한 곳 주는 '가상 발전소'.. 에너지 시장 판이 바뀐다

이태동 기자 2021. 5. 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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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들 가상발전소에 투자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되는 교류 전기 공급망은 치명적 단점이 있다. 발전소가 돌아가는 동안만 전기 공급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형 발전소 중 하나가 멈추면 여기 연결된 공장과 가정 수백만 곳의 전기가 끊어진다. 이런 상황에선 전기 소비량이 갑자기 늘거나 줄어드는 것에 바로 대처하기 어렵다. 그래서 항상 10~20%의 여유를 두고, 필요 이상으로 발전소를 돌린다. 그만큼 발전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는 풍력과 태양광 발전 등 이른바 친환경·신재생에너지의 등장과 함께 더 심각해졌다. 풍력과 태양광 발전은 원자력이나 화력 발전처럼 항상 일정한 양의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바람과 태양빛의 세기에 따라 계속 발전량이 바뀌므로, 그대로 전력망에 연결했다가는 정전 사태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이와 같은 기존 전력 공급 체계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기술이 이른바 ‘가상 발전소(Virtual Power Plant·VPP)’다. 원자력·화력 등 기존 발전소와 더불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풍력·태양광·수력 발전소 등 다양한 물리적 발전소를 서로 보완적으로 엮어 전력 공급에 최적의 효율성을 내게 하는 개념상의 발전소다. 수백개의 발전소가 매 순간 서로 짝을 바꿔 지으며 각 지역을 담당하는 수십개의 가상 발전소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상황에 맞춰 발전량 조절이 쉽고, 발전 효율성도 크게 높아진다. ESS(에너지저장장치)를 이용, 남는 전기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그때그때 꺼내 쓸 수도 있다. 전기 에너지의 ‘티끌 모아 태산’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태양광과 풍력, 원자력 등 다양한 전력원(源)을 묶어 마치 하나의 발전소처럼 운영하는 것이 가상 발전소의 개념이다. 스마트 그리드를 통해 수집된 기업과 가정의 전력 소비 정보를 파악해 그때그때 최적의 전력 공급망을 구성하므로 발전 효율성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날씨의 영향으로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신재생 에너지의 활용 비율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다. /게티이미지뱅크·그래픽=김성규

◇‘스마트 그리드’ 덕분에 가능

가상 발전소는 스마트 그리드(smart grid)라고 불리는 차세대 전력망 기술에 바탕을 둔다. 전기 소비자(기업·가정)와 공급자(발전소)가 소비량과 발전량을 실시간으로 측정, 5G(5세대 이동통신)나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 전력 관리 센터로 보낸다. 전력 관리 센터는 이 정보를 AI(인공지능)로 분석, 최적의 발전량과 전력 공급 방법을 정해 물리적 발전소를 가동한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발전소들이 서로 보완적으로 묶여 여러 개의 ‘가상 발전소’를 이룬다.

충남 서산의 한 제철 공장에서 대형 전기로를 가동한다고 치자. 하필 이 공장에 연결된 풍력 발전소가 바람이 약해져 발전량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러면 전력 관리 센터의 AI가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가상 발전소 구성에 변화를 준다. 서산의 풍력 발전소는 전력 사용량이 낮은 지역으로 돌리고, 전력 공급에 여유가 생긴 전남 영광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추가 전력을 끌어온다. 이런 식으로 추가 발전 없이 1~2분 내에 서산에 공급되는 전기를 대폭 늘릴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제철소의 자체 발전소나 한전의 다른 대형 발전소를 몇 시간 전부터 가동시켜야 할 일이다.

가정의 태양광 발전 패널과 전기차 배터리도 가상 발전소에 참여할 수 있다. 맑은 날 대낮에 가정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집안에서 모두 쓰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의 스마트 그리드 장치가 이를 5G 통신망으로 전력 관리 센터에 알리면, 센터의 AI가 이 전기를 지역의 가상 발전소에 제공, 근처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쓰도록 한다. 또 전기차를 주차하면서 충전 장치를 통해 스마트 그리드에 연결하면, 출퇴근할 때 필요한 만큼의 전기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상 발전소에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脫탄소 트렌드와 함께 확산할 듯

가상 발전소는 이런 식으로 전력망 운영 비용을 크게 줄여준다. 에너지 업계는 이 때문에 탈(脫)탄소화 기조에 맞춰 가상 발전소 기술이 급속히 확산할 것으로 예상한다. 대형 화력 발전소 대신, 작은 친환경 발전소를 많이 만들어 탄소 발생량을 줄이는 것이다. 실제로 가상 발전소 기술은 신재생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됐다. 2008년 독일 카셀 대학이 태양광과 풍력, 바이오가스, 양수 발전 설비 36개를 연결해 기술적 가능성을 증명했고, 이후 유럽 전력회사 스타트크라프트(Statkraft)가 2012년 독일에 세계 최초의 가상 발전소를 세웠다. 이 가상 발전소에는 현재 1400개의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참여하고 있다. 생산되는 전력량은 총 1만MW(메가와트), 원자로 10개 분량이다.

세계적 기업들의 투자도 줄을 잇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 로열더치쉘은 지난 2월 유럽 가상 발전소(VPP) 운영사 넥스트크라프트베르케(Next Kraftwerke)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유럽 8국에 분산된 1만여개의 태양광·풍력·수력·바이오가스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전력을 통합 관리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테슬라도 2018년부터 호주에서 5만 가구가 참여하는 가상 발전소 실험을 하고 있다. 독일 지멘스와 미국 오토그리드(Autogrid), 일본 히타치 등도 가상 발전소 시장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선 아직 가상 발전소 기술이 쓰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18년 한화큐셀이 일본 정부의 가상 발전소 사업자에 선정되고, 한국전력 자회사인 중부발전과 SK E&S가 작년 미국에 진출하는 등 기업들의 해외 시장 참여는 활발하다. 미국 경제지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전 세계 가상 발전소 시장 규모는 연평균 27%씩 성장, 2019년 8억7000만달러에서 2027년엔 28억5000만달러 규모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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