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화가들이 그린 '76인의 초상'..한 점 한 점, 시대를 읽는다

배문규 기자 2021. 5. 1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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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품, 국립중앙박물관서 특별전시회

[경향신문]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전에선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부터 에드 시런(1991~)까지 500년을 넘나들며 초상화의 의미를 살펴본다. 초상화를 소장한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일시 휴관에 들어가면서 상당수 작품이 처음 영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림 맨 윗줄 왼쪽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이작 뉴턴, 애나 윈터, 데이비드 호크니,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자하 하디드, 엘리자베스 1세, 호레이쇼 넬슨, 아서 캐플 남작 가족, 팀 버너스 리, 찰스 다윈, 토머스 하워드, 에드 시런, 에이미 와인하우스, 브론테 자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78점 국내 첫 소개
워홀·호크니 등 자화상도 눈길

얼굴이 파랗다. 검은 눈동자는 허무를 응시하는 듯하고, 벌어진 입에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환청이 아니라 실제 노래가 들려온다. “For you I was a flame, Love is a losing game….” 2011년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초상화 ‘에이미 블루(Amy Blue)’에선 그의 우울했던 삶이 그림을 뚫고 나올 것 같다. 한 사람의 개성, 더 나아가 역사를 온전히 담아내는 초상화의 힘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는 영국의 초상화 전문 미술관인 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 소장품 78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다. 76명의 인생 이야기를 73명이 그린 ‘호사스러운’ 전시다. 빛나는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 주인공이기에 그러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당대 최고 화가들이 그렸다는 점에서 역시 그렇다. 초상화를 본다는 것은 ‘이미지를 보는’ 시각적인 경험인 동시에 ‘그림 속 인물과 만나는’ 심리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전시는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초상화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살펴본다.

■ 76명의 인생 이야기

사진·조각·스크린 등
다양한 작업으로 초상의 개념 확장

시작은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이다. 1856년 설립된 미술관의 1호 소장품이다. ‘명성의 전당’인 초상화미술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명성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이해했고, 소설가 찰스 디킨스 역시 자신의 이미지를 홍보에 활용하는 데 능했다고 한다. 반면 편견 때문에 역사에서 묻히기도 한다. 메리 시콜의 초상은 A4 용지보다도 작은 크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콜은 크림전쟁 당시 나이팅게일 간호단에 합류하려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는 단독으로 간호 활동을 펼쳐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계 여성이 됐지만, 사망 이후 잊혀졌다. 20세기 후반 들어 업적이 재평가되면서 겨우 수소문한 그의 초상이 미술관에 들어오게 됐다.

초상이라는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힘을 표상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에선 확고한 시선과 함께 화려한 의상이 눈에 띈다. 그는 순결과 재생을 상징하는 불사조 모양의 보석을 착용하고 있다. 튜더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는 순수를 상징하는 진주와 더불어 ‘처녀 여왕’의 왕권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권력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여성의 교육권을 위해 투쟁한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초상 사진에는 파슈툰족의 전설적 영웅을 칭송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월드와이드웹’ 창시자 팀 버너스 리는 소박한 옷차림으로 노트북이 든 가죽 백팩을 메고 있는 청동 조각으로 형상화됐다. ‘위대한 보통 사람’이다. 현대의 위인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한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오드리 헵번, 가수 비틀스와 에드 시런, 모델 나오미 캠벨,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보그 편집장 애나 윈터,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 역시 국가 공인 초상화에 얼굴을 올렸다.

초상은 정체성과도 닿아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옹호자였던 헨리 리는 초상을 통해 여왕에 대한 헌신을 드러냈고,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초상화에 그려진 비올라 다 감바에선 음악가라는 그의 직업 정체성을 살펴볼 수도 있다. 터번을 쓰고 코란을 목에 건 아유바 술레이만 디알로의 초상화는 자유를 얻은 노예를 그린 최초의 초상인 동시에 아프리카인을 동등한 인물로 예우한 작품이었다. 남녀 양성이었던 18세기 검객 슈발리에 데옹과 남성복을 입고 있는 여성 작가 래드클리프 홀의 초상화는 성 정체성이 시대에 걸쳐 유동적으로 변화해왔음을 보여준다. 가수 데이비드 보위는 여러 페르소나를 무대에서 선보여 성별 고정관념을 뒤집은 현대의 위인이다.

■ 얼굴을 그린 73명

이번 전시에선 작품 표찰마다 아무렇지 않게 써 있는 이름들에 주목해야 한다. 초상 속 인물만이 아니라 초상을 그린 예술가 역시 주인공이다. 안토니 반 다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토머스 게인즈버러, 조슈아 레이놀즈, 존 컨스터블, 존 에버렛 밀레이, 오귀스트 로댕, 앤디 워홀, 루시언 프로이드, 데이비드 호크니 등 당대 최고 작가들의 이름에 놀라게 된다. 화가와 초상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자화상’이다. 작가의 가장 개인적 작업인 자화상은 예술적 기교에 대한 것부터 자아 성찰까지 다양한 동기에서 만들어진다. 예술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혹은 어떻게 비치길 원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초상의 개념 역시 확장한다. 회화만이 아니라 사진, 조각 등 다양한 작업들을 선보인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작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초상은 색이 계속해서 변하는 LCD 스크린으로 만들어졌다. 하디드가 공간의 유동성을 설계로 구현했듯, 그의 모습을 유동하는 컴퓨터 초상으로 표현한 셈이다. 엘리자베스 2세 초상은 만 개 이상의 이미지를 촬영해 홀로그램 화면을 만들어냈다. 트레이시 에민은 자신의 데드마스크를 초상으로 내놨다. 전시의 마지막인 그레이슨 페리의 자화상 ‘시간의 지도’는 제목 그대로 지도다. 성곽 도시의 지도 형태 위에 작가가 인생에서 겪은 각종 사건과 경험, 감정 등을 담아냈다.

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의 말이 초상의 의미를 한데 엮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초상화 한 점이 여러 권의 전기보다 실질적인 설명을 줄 수 있음을 종종 느낀다. … 초상화라는 작은 촛불이 빛을 비춤으로써 어떤 전기는 처음으로 읽히며 인간의 해석이 가미될 기회를 갖게 된다.” 전시는 8월15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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