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K방역보다 나은 K정치

2021. 5. 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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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보다 마케팅 치중한 문 정부 'K브랜드' 
어정쩡한 포용보다 단죄 원하는 국민 정서 
'필벌'의 K정치,  이익 많은 해법일 수도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난달 21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오세훈(오른쪽) 서울시장, 박형준(왼쪽) 부산시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시장은 이날 전직 대통령 사면 검토를 요청했다. 연합뉴스

기업 마케팅 관점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의 특징은 ‘K브랜드’ 전략이다. 정책의 실질적 성공 여부에 대한 검증 없이 겉으로 괜찮아 보이면 과감하게 알파벳 ‘K’를 붙인다. 정부 홍보사이트 ‘K정책 브리핑’을 열람했더니, K가 붙은 정책이 수도 없다. K방역에서부터 K뷰티, K경제, K조선, K푸드가 검색되더니, 가장 최근에는 K반도체 전략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K브랜드 정책을 언급한 경우도 꽤 있다. “K방역을 넘어 K일상이 또 다른 세계 표준이 되고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나가자.” 지난해 4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때 발언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국민 계도 차원에서 보급했던 국민교육헌장이 생각났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중략)…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는 내용인데, ‘K정책으로 세계를 선도하자’는 문 대통령의 언급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국수주의적 공통점도 감지할 수 있었다.

사실 박정희 정권과 문재인 정부는 내용과 방향은 다르지만 ‘한국적 민주주의 추구’라는 화두에서 공통점이 있다. 박 정권은 대통령을 독재자 반열로 끌어올리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했다. 우리 체형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비유로 민주주의 보편가치를 부인했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측면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퇴임한 대통령에 대한 단죄의 전통을 확립했다. 문 대통령 퇴임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 나라에는 21세기 이후 취임한 전직 대통령 가운데 온전한 인물이 없게 됐다.

전직 대통령을 사법적으로 단죄한 역사가 없는 미국 관점에서 보면 불행한 역사로 보인다. 그래서 포용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지만, 한국 유권자들의 정서에는 이게 맞지 않는 모습이다. 올 들어 여당 대표와 서울ㆍ부산시장의 전직 대통령 사면 발언이 나왔을 때의 냉랭했던 여론은 진영을 뛰어넘은 단죄의 정서를 정확히 보여준다. 내년 3월을 준비하는 주요 대권주자들도 ‘단죄’와 ‘정의’ 코드를 '디폴트' 값으로 삼아 전략을 짜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차기 대통령이 되면 문 대통령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홍준표 의원의 발언은,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게 확실하지만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철저한 단죄가 핵심 코드인 K정치는, 문재인 정부가 자랑하는 K방역이나 K경제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효율을 낮춰 경제를 살린 경우는 없지만, 철저한 단죄로 기강을 잡은 건 중국 명나라 등 성공사례가 꽤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6대, 8대 황제는 주기진(朱祁鎭). 같은 인물이다. 측근 환관의 꼬임으로 1449년 무리한 원정에 나섰다가 몽골의 포로가 됐다. 명 조정이 이복동생을 새 황제로 삼자, 몽골은 그를 돌려보냈다. 1457년 내부 반란으로 다시 8대 황제가 됐고, 동생을 옹립했던 인물들을 대거 처형했다. 여기까지는 왕조의 전형적 몰락 스토리다. 그러나 명은 이때부터 다시 일어서, 홍치시대(1488~1505)라는 전성기를 맞는다. 역사가들은 8대 황제, 주기진이 자신을 다시 황제로 세운 은인도 죄가 있으면 과감히 단죄한 것에 주목한다.

대한민국은 전후 독립국 중 선진국에 진입한 유일한 국가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노력이 어우러진 덕분이다. 그 과정에서 후발국이 본받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모델도 정립했다. K정치의 핵심코드, ‘필벌의 정치’도 남용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성공 모델이 될 수 있다. 미래 권력자로 하여금 몸가짐을 삼가고 법에 의한 통치와 혹세무민 선동정치 유혹을 떨치게 만들 수 있다. 단죄 대상인 개인에게는 잔인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손해보다 이익이 큰 해법일 것이다.

조철환 에디터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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