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달할수록 야생마처럼 날뛰는 마음… 고삐는 독서·수행으로

양산/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1. 5. 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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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처님오신날, 통도사 方丈 성파 스님 인터뷰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 스님은 "기술 문명이 발전할수록 마음의 고삐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부처님오신날(19일)을 맞아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方丈) 성파(性坡·81)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엔 하늘엔 오색 연등, 땅엔 색색 꽃이 만발해 있었다. 화가·도자기·옻칠 작가로도 활동하는 스님의 ‘작업실’인 서운암 앞에선 스님의 트레이드 마크인 장독대 항아리 수백 개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스님은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역발상’의 대가다. 남들이 모두 버리는 것에서 보물을 찾아낸다. 1980년대부터 항아리 5000개를 수집했고, 토종 된장·간장 사업을 벌였다. 8만대장경을 10년간 16만장의 도자기 판으로 구워냈고, 겨우 명맥만 잇던 옻칠 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다. 속세뿐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쓸데없는 일’로 치부되던 시절에 남 눈치 보지 않고 밀어붙였다. 30~40년이 지나서야 세상은 사찰을 중심으로 이어져오던 전통문화를 지키는 일이었고, 시주에만 의지하지 않고 사찰 스스로 자립하기 위한 실험이자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지난주 성파 스님을 만났다.

-큰절(통도사)에 방장실이 있는데, 서운암에서 작업하시는군요.

“방장실에서 잠자고 아침 먹고 회의한 후에 낮엔 서운암으로 올라와 작업합니다. 최근엔 반구대암각화 등을 나전으로 수놓고 옻칠을 입힌 대형 작품을 물속에 집어넣은 ‘수중 전시회’도 열고 있지요.”

-스님이 장 담그고, 도자기 대장경 굽고, 옻칠 작업하는 것은 지금도 흔하지 않습니다. 처음 작업을 시작한 30~40년 전엔 절에서도 오해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만.

“오해가 많았지요. 외도(外道)라고 욕먹을 짓이었지요. 그렇지만 저는 원효 스님이 말씀하신 ‘출출가(出出家)’ 정신을 떠올렸습니다.”

-출출가란 무슨 뜻인가요.

“단순히 머리 깎고 절로 출가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왜 출가했는가를 되새기며 재발심한다는 뜻입니다. 저로서는 40대 중반 통도사 주지를 마치면서 그런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20대 초반에 월하 스님을 은사로 통도사로 출가해 20년간 강원(講院)·선원(禪院) 다니며 수행했습니다. 그러다 시절인연 때문에 통도사 주지를 살다가 소임을 놓았을 때가 40대 중반이었습니다. 20년 절 생활을 하면서 ‘이 또한 익숙해졌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새 출발 해보자 했지요.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란 말이 있지요. 강원과 선원에서 제 나름대로 열심히 소임을 살았으니 이젠 다른 방향으로 만행을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만행이었나요.

“역사적으로 사찰은 건축·토목·공예 등 전통문화를 시작하고 발전시킨 원점입니다. 궁궐 지을 때 목수나 기와, 단청 등의 책임자는 스님이었습니다. 산성(山城) 쌓기, 종이 제조와 인쇄도 모두 스님이 했지요.

그런 전통을 되살려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통도사 서운암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독. 성파 스님은 1980년대부터 버려진 장독을 수집해 간장, 된장을 담갔다. 현재는 통도사 이름으로 정식 공장을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

-그 시작이 항아리 수집이었다고요.

“1970년대 말 주거 문화가 아파트로 바뀌면서 주택가 골목마다 항아리가 굴러다녔어요. 저는 ‘청자, 백자와 값은 비교가 안 되지만 항아리는 수천 년 우리 민족 생활 문화의 정수인데 저렇게 무시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고물상들에게 ’50년 이상 된 항아리 모아오면 사겠다'고 해서 5000개를 모았습니다. 청자, 백자야 왕실, 귀족이 사용했지만 항아리는 귀천(貴賤) 없이 모두가 써온 것이잖아요. 그때는 그 항아리로 뭘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항아리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1980년대 초반 부산을 시작으로 일본의 왜간장, 왜된장이 상륙하기 시작했어요. 아파트에서 직접 담가 먹지 못하니 일본 제품이 들어온 것이지요. 속으로 ‘우리가 왜정 때 그 고생을 했는데, 된장까지 일본 것을 먹어서야 되겠나’ 싶었지요. 그래서 모아둔 항아리에 우리 콩으로 된장, 간장을 담가서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에도 나오고 했더니 전국에서 전통 장 담그던 분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그 덕에 왜간장, 왜된장은 물러갔지요. 그 된장, 간장이 도자기 16만 대장경, 옻칠까지 모두 밑거름이 됐습니다.”

-사찰 재정 자립에 대한 생각도 있었습니까.

“저는 작품을 팔지도, 공짜로 주지도 않습니다. 출가 후 얼마 되지 않아 겪었던 시주에 관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신도님이 장삼 한 벌을 해주셨습니다. 마침 장삼이 다 떨어진 다른 스님이 있기에 드렸습니다. 얼마 후 그 신도님이 ‘왜 장삼을 안 입느냐’고 물었어요. 우물우물 넘겼지만 참 곤란하더군요. 절집 어른들이 왜 ‘시주 물은 쇠[鐵] 녹인 물 마시듯 하라’ ‘적 화살은 피해도 은혜 화살은 피할 수 없다’고 하는지 그때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사(佛事)할 때도 가능하면 특정 개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최근엔 ‘책 100만권 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계시는데.

“목표가 100만권이 아니라 무한대입니다. 흔한 말이지만 책은 인류 지식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런데 지금 디지털 시대라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지요. 가족들은 물론 도서관에 기증하려 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해요. 지금 은퇴하는 교수님들이 유학 갔던 시절을 생각해보세요. 배를 곯아가며 사 모은 귀한 책들을 무게로 달아 팝니다. 80년대 항아리 신세지요.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책이 필요한 때가 옵니다. 절은 땅도 넓고 늘 스님들이 사는 곳입니다. 통도사만 해도 자장율사가 창건한 지 1400년이지만 한 번도 폐사(廢寺)된 적 없습니다. 현재 40만권쯤 모였는데 어느 정도 모이면 분류해서 통도사 경내 소나무 아래, 개울가 등 곳곳에 벤치를 놓고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꾸미는 게 꿈입니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한 사고(史庫)처럼 ‘미래판 사고’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파 스님이 10년에 걸쳐 도자기판으로 구워낸 16만 대장경. 해인사 8만 대장경은 앞뒤로 판각돼 있는데, 도자기판은 앞면만 대장경 내용을 새겨 2배인 16만 대장경이 됐다. /김동환 기자

-책이 왜 중요한가요.

“미래는 IT 시대, 기술 문명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정신적 빈곤은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병은 약으로 안 고쳐집니다. 자기 안의 부처를 찾아야 합니다. 마음 닦는 것 외엔 치유 방법이 없습니다. 기계·기술 문명에 의지하면 마음은 야생마처럼 날뛸 것입니다. 그럴 때 고삐가 있어야 날뛰는 마음을 길들이죠. 독서가 그 고삐가 될 것입니다. 독서는 미래를 대비하는 군량미입니다.”

-스님은 수행과 행정, 이른바 이판사판(理判事判)을 다 경험하셨지요.

“이판사판이란 지혜와 행동입니다. 불교에선 혜(慧)와 행(行)이라 하지요. 혜와 행은 따로 놀면 안 됩니다. 혜 안에 행이 있고, 행 안에 혜가 있어야 합니다. 법당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 양쪽으로 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행을 뜻하는 보현보살이 계십니다. 법당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혜와 행을 협시(脇侍)보살처럼 갖춰야 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놓친 것이지요. 밖에서 열심히 보배를 찾아 헤매면서 정작 집안의 보배를 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깥을 향한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밖으로 향하기만 하면 남의 잘잘못은 낱낱이 보고 시비(是非)하게 됩니다. 그러나 돌이켜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면 행동도 달라지겠지요.”

-청년층은 취업, 결혼, 출산, 집 장만 등 모든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나이 많은 사람에게 물으면 안 됩니다. 왜정, 6·25 다 겪은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어려움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 때보단 다 좋아졌는데, 그 정도 가지고’ 이럽니다. 해법이 안 나와요. 청년들의 어려움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다 보면 해답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덕담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저는 남에게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저를 향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할 뿐입니다. 모두들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사는 분들인데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현재가 중요하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군요. 시간은 과거로부터 흘러 현재에 이르렀고, 현재에서 출발해 미래로 갑니다. 현재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지곤 합니다. 특히 정치하는 분들은 역사의 흐름을 좋은 방향으로 잡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은 어떤 지도자가 어떻게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 훌륭하게 역사를 일궈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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