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기본소득의 비용
[경향신문]
슬슬 내년 대선을 향한 경주가 시작될 모양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는 공정과 기본소득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위와 소득이 부모 힘이 아니라 자신의 소질과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 그러나 가장 가난한 사람도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가기에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는 사회. 캠프의 브레인들은 이런 사회를 꿈꾸게 하는 공약을 만들어내느라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사회안전망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선진국들을 정치적 파국으로부터 지켜낸 소득보장 프로그램은 조건부 기본소득의 개념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사람에게만 기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호응을 얻은 것은 누구나 밧줄에서 떨어지는 곡예사의 불운을 경제적으로 겪을 수 있으며, 따지고 보면 능력이라는 것도 하늘이 정하는 운에 따르는 것이니 공동체가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재원 확보를 위한 세금에 대한 저항 때문에 당장은 가장 고통받는 사람부터 엷게, 그러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혜택의 깊이와 범위를 더해 나가자는 실용주의도 깔려 있다.
최근 상황이 변하고 있다. 아무 조건 없이 부자를 포함한 모든 성인에게 동일한 금액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주장이 인기를 얻고 있다. 빈부격차의 심화와 로봇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국민의 태반이 실업자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주요 원인이다. 기존 복지 시스템의 느린 속도와 사각지대를 피하기 위해 여러 국가가 시행한 보편적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복지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화했다. 작년 이맘때 전 국민 재난지원금 100만원을 받고 좋아하던 부자 친구의 모습이 생각난다. 역시 공짜는 좋다는 것이다. 많은 세금을 내고 있으니 받을 권리도 있고. 그런데 이걸 반복하려면 앞으로 부자는 세금을 200만원쯤 더 내야 할 것 같다고 하니 그건 싫다고 한다.
25세 이상의 모든 성인에게 월 5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면 약 250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의 13%, 정부 총지출의 절반에 해당하며 사회복지 총지출을 초과하는 거액이다. 이 돈을 확보하려면 국민이 그만큼 추가적 세금을 내야 하고 누진세제하에서 그 대부분을 부자들이 부담해야 한다. (기축통화를 갖고 있지 않은 소국 개방경제에서 정부채권이나 돈을 계속 찍어내면 증세를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즉 보편적 기본소득의 요체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돈을 주기 위해 정부에 세금을 더 내는 것이다. 필요한 세금이 엄청나다고 보편적 기본소득에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었다 되돌려주는 데 큰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필자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이다. 조건부 기본소득의 큰 문제는 수혜자가 되기 위해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수혜자의 자존심이 손상을 입는다. 또한 일부러 가난해진 사람과 허위로 가난해진 사람, 그리고 제도가 포착하지 못한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기본소득이 아니라 복지행정의 디지털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반박이 타당하게 들린다. 그런데 매우 놀라운 것은 기본소득을 둘러싼 언론의 논쟁에서 조세의 왜곡효과라는 경제학 기초 개념이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세금을 더 걷으려면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에 대한 세율을 증가시켜야 한다. 그러면 노동과 저축의 인센티브가 감소하여 생산이 줄어든다. 이러한 주장은 보수의 경제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보수는 조세의 왜곡효과가 매우 크고, 진보는 작다고 생각할 뿐 모든 경제학자가 조세의 왜곡효과가 존재함에 동의한다.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르지만 250조원의 세금을 걷으면 적게는 수십조, 많게는 수백조원어치의 생산이 증발한다. 이 큰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부자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사치를 피하고 세율 인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의 복지 제도가 필요하다.
그래도 토지세를 부과하여 액수가 작아도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안에는 솔깃하다. 토지는 세금을 매겨도 어디로 도망가지 않기 때문에 조세의 왜곡효과와 타인으로의 전가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세수를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선거에서 진 진보 표방 정부가 주택보유세 몇% 올린 것부터 반성하고 있는 정치현실에서 보편적 기본소득이 보유세 저항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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