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박범계 장관이 이성윤 공소장 공개에 흥분하는 이유

선우정 논설위원 2021. 5. 1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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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같은 공소장
법대로 한 진짜 검사와,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추악한 술수를 부린
권력의 낯 뜨거운 행적
그 적나라함에
문 정권은 얼굴을 못 들 것이다

작가라면 이성윤 공소장을 읽었으면 한다. 선악의 대립 구도가 분명하며, 권력의 군상들이 연출한 초여름 촌극의 극적 농도가 매우 진하다. 문장을 문학적 표현으로 손질하고, 묘사와 설명을 덧붙이면 훌륭한 논픽션을 만들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공소장 공개에 대해 박범계 장관이 뿜어내는 격한 반응도 공소장을 읽으면 납득할 수 있다. 부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붙어 있는 검사 선서. 검사들이 매일 접하는 것이다. 김학의 불법 출금 수사를 2년 만에 부활시킨 공익제보자는 이 선서를 다시 읽고 제보를 결심했다고 했다.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 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수원지검 안양지청 수사팀 윤원일 검사. 2019년 4월 11일 대검찰청이 박상기 법무장관의 의뢰를 받은 수사를 그에게 맡겼다. ‘누군가 김학의씨에게 출국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흘린 것 같으니 찾아내라’는 것이다. 열심히 수사했다. 그런데 증거들은 반대쪽을 가리켰다. 출국을 막은 조치가 불법이었고 이를 합법으로 속이기 위해 공문서를 조작했다. 정권 보위 수사가 저격 수사로 변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 없다. 그는 덮지 않았다. 공소장은 그 이유를 쉽게 설명한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검사는 수사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 195조를 따랐다’고. 하지만 이후 주변인 행태를 보면 이 ‘법대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알 수 있다.

수사 착수 두 달이 지난 6월 19일, 윤 검사는 지휘부인 대검 반부패강력부에 계획을 알렸다. 대검의 첫 반응은 “다른 데에도 보고했느냐”는 물음이었다. 공소장은 의도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음습한 의도를 짐작한다. 혐의가 다른 데로 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반부패부는 이성윤 부장 주재로 회의를 열었다. “의뢰 내용이 아닌 것을 수사해 시끄럽게 만든다”는 불평이 나왔다. 수사가 의무인 검사가 한 소리다. 그 후 벌어진 일은 전쟁 논픽션을 읽는 듯하다. 장관, 청와대 수석, 비서가 화력을 보태고 지연, 학연, 사법연수원, 운동권 서클 인연 등 온갖 연줄을 동원했다. 평검사 한 명을 잡기 위해서.

이성윤 부장은 지연을 통해, 소속 과장은 학연을 통해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 다른 갈래에서도 압력이 들어갔다. 공소장에 따르면 수사 대상자(이규원 검사)가 이광철 행정관에게, 이 행정관이 조국 민정수석에게, 조 수석이 윤대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윤 국장이 안양지청장에게 청탁했다. 이규원과 이광철은 연수원 36기 동기, 조국과 윤대진은 대학 운동권 선후배, 윤대진과 안양지청장은 연수원 25기 동기다. “이 검사가 곧 유학 간다니까 수사하지 말라.” 정권 이너서클이라는 법 전문가들이 끼리끼리 뒷구멍에서 한 소리다. 세계 후진국 로비스트들에게 이 공소장을 교본으로 뿌려라.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검사 역을 맡은 조승우와 경찰 역을 맡은 배두나. 시즌2의 키워드는 이렇게 정해졌다. '침묵을 원하는 자, 모두가 공범이다.' 윤원일 검사가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수사를 시작했을 때 권력은 침묵을 강요했다. 드라마가 아니라 문재인 정권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압박은 수사팀에 전달됐다. 수사팀엔 수사를 주도한 윤 주임검사 외에 최승환 검사, 이들의 상관인 장준희 부장검사가 있었다. 지청장은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 다른 검사 결혼식장에서까지 압박했다. 지청장은 직접 윤 검사에게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 그때 발언이 공소장에 적혀 있다. “(긴급 출금 당시) 급박한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윤 검사 반응은 공소장에 없다. 결혼식 3일 후 사건 주임이 윤 검사에서 장 부장검사로 변경됐다는 사실만 기록했다. 그의 반응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았다. 주임검사가 바뀐 뒤에도 수사팀은 법무부 직원 2명을 불러 수사를 계속했다. 박상기 법무장관이 윤대진 국장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시켜서 직원들이 한 일을 조사하면 나까지 조사하겠다는 것이냐?” 범죄 자백인가. 이런 코미디가 없다. 윤 국장은 안양지청장에게 푸념했다. “장관이 왜 계속 조사하냐고 나한테 엄청 화를 내서 내가 겨우 막았다.” 작가라면 일대 반전의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박 장관이 수사 의뢰 때 넘긴 자료가 불법 출금 사건의 증거가 됐다. 그의 정체는? 엑스맨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까지 있다. 안양지청 수사팀은 이 문제로 반성문 같은 경위서를 냈다. 수사를 중단한다는 보고서도 올렸다. 공소장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드라마는 끝이 아니다.

수사팀의 좌절과 분노가 세상을 움직였을까. 1년 6개월 후 공익 신고와 언론 보도를 통해 문 정권이 파묻은 수사가 부활했다. 이 이야기는 길게 쓸 수 없다. 수사 검사와 기자, 신고자가 훗날 상세한 기록을 남길 것이다. 기승전(起承轉)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수사는 마지막 결(結)을 향하고 있다. 이성윤 공소장은 마지막 시즌의 첫 회에 해당한다. 이광철·윤대진·박상기·조국, 그리고 어둠 속에 있을지 모를 ‘최종 보스’에 대한 공소장이 드라마를 완성할 것이다.

쟁쟁하다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도 아니었다. 수원지검 안양지청이다. 여기서 권력을 향해 “법대로 하겠다”고 나섰다가 된통 깨지고 시말서까지 쓴 검사들을 기억하자. 이런 검사들 때문에 권력이 편히 잠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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