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미칼럼] '탈원전'에 길 잃은 탄소중립

황정미 2021. 5. 18.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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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탄소중립은 고통스러운 여정
정책 전환 없는 '구호 정치' 안 돼

문재인 대통령 취임 4주년 연설과 회견 사이에 영상 한 편이 방영됐다. 플라스틱 쓰레기와 산불, 미세먼지 등 갈수록 심각한 지구 환경 위기에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오는 30, 31일 서울에서 열리는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 정상회의 홍보물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 코로나 백신 수급 논란, 장관 부실 검증 파문 같은 현안이 산적한 4주년 연설에 ‘아름다운 지구를 우리가 구하자’는 감성적 메시지의 영상이라니. 청와대 의전비서관 탁현민 연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난해 대통령의 ‘2050 대한민국 탄소중립 선언’ 생중계를 흑백 영상으로 내보냈다. 고 신해철의 ‘더 늦기 전에’ 뮤직비디오를 틀고 집무실 책상에 ‘환경위기시각’을 가리키는 탁상시계를 배치하는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된 2050 탄소중립 비전을 ‘문재인의 어젠다’로 띄우려는 의도로 읽혔다. 실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탄소중립 참여 선언이 한참 늦었고 국제 사회가 만족할 만한 온실가스 감축치를 내놓지도 못했지만 ‘선언 쇼’만큼은 거창했던 셈이다.
황정미 편집인
정부는 이달 중 대통령 직속의 탄소중립위원회를 구성해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기 위한 로드맵을 논의한다. 해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나가 30년 후에는 배출량과 흡수량이 같아지는 목표치에 도달해야 한다.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은 7억2800만t이다.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가 간 이동이 줄고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국내외 온실가스 배출량이 5∼7% 줄었다고 한다. 국민들의 일상이 멈추다시피 했는데도 그 정도밖에 줄지 않았다니 ‘제로’ 수준으로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 난다.

지난 12일 본사와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공동 주최로 열린 세계에너지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2050 탄소중립 여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 10위권에 든다. 화석연료 비율이 80%를 넘는 데다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와 같은 에너지집약 업종을 주력으로 삼고 있어서다. 에너지 발전 비중과 산업 구조를 대대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탄소중립 목표 달성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내 에너지 발전량 1위는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뿜어대는 석탄화력발전(2019년 40.4%)이다. ‘탈원전’을 선언한 문재인정부가 내세우는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6.5%에 불과하다. 당장 2030년 감축 목표치를 높여야 하는데 기존 목표치(5억3600만t) 달성도 어려운 형편이다. 단기간에 석탄 발전량을 낮추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일 묘책은 없다.

온실가스 배출이 거의 없는 원전은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짜는 데 핵심이다. 선제적인 탄소중립 정책을 펴는 유럽에서조차 원전은 ‘지속가능한 탈탄소에너지’로 간주하는 흐름이다. ‘기후변화 전도사’를 자임하는 빌 게이츠는 “무탄소 에너지원인 원자력이 기후변화를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탈핵, 탈원전 구호를 외치는 바람에 우리의 탄소중립 로드맵은 길을 잃었다. 관료들 사이에서 “답이 안 나온다”는 푸념이 나올 만하다. 탈원전을 하면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건 총, 칼을 내려놓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말처럼 공허하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 앞에서 SMR(소형모듈원자로) 연구를 꺼낸 데는 이런 현실적 고민이 깔려 있다고 본다. 대형 원전에 비해 안전성이 높으니 이제라도 SMR 분야에 투자해 탄소중립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미래 세대를 위한 2050 탄소중립은 차기 정권, 차차기 정권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추진해야 할 사안이다. 정책의 일관성을 위해 탄소중립 로드맵만큼은 전문가들 주도로 만들어야 한다. 탄소중립이 탈원전처럼 ‘구호 정치’로 소비돼선 안 된다. 보여주기식 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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