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아니면 '소란'.. 보수와 5·18, 악연의 기억들

오대근 2021. 5. 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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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5월 18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고 있다(왼쪽).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019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을 위해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망언 의원' 징계 등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조화를 던지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은 18일 송영길(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기현(가운데)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최근 여야 정치인들이 잇따라 '민주화운동의 성지' 광주를 찾고 있다.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호남의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적 '구애' 행보로 해석된다. 특히 5·18의 가해자 또는 그 후신으로 인식돼 온 국민의힘의 광주행이 두드러진다.

지난주 당 소속 초선 의원들이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와 정화작업을 벌인 데 이어 17일에는 정운찬, 성일종 두 의원이 5.18유족회가 주관한 추모제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나란히 초청돼 유족들과 손을 맞잡았다. 18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1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김기현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송영길 민주당 대표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그러나 불과 2~3년 전만 해도 국민의힘의 전신인 자유한국당, 새누리당, 한나라당 인사들의 광주행은 '소란' 아니면 '논란'을 일으키기 바빴다. 껄끄럽기만 했던 광주와 보수의 관계는 어디까지 개선될 수 있을까. 과거 사진 속에 남은 5·18과 보수, 그 악연의 기억을 소환해 보았다.

2003년 제2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입구에서 한총련 학생들의 기습시위로 길이 막히자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묘지 앞 가드레일을 넘고 있다. 연합뉴스

2003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최병렬 한나라당 의원은 대학생들의 기습시위를 피해 샛길로 이동하다 도로의 가드레일을 뛰어넘는 굴욕적인 장면이 언론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같은 당 서청원 대표는 거세게 항의하며 달려든 학생들과 일행 간의 몸싸움 과정에서 양복 단추가 떨어져 나가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의 소란은 한총련과 전남대생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미 굴욕외교'를 문제 삼으며 행사장 입구를 점거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의 출입을 막아서면서 벌어졌다.

보수 정권에서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 초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참석자가 다 함께 부르는 제창에서 합창단만 부르는 합창으로 바꿨다. 2013년 제33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통합당, 진보정의당 대표 및 참석자들이 일어서서 합창단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동안 박 전 대통령은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뒤늦게 일어났고, 끝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서 5·18 정신을 폄하했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이후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이 이 노래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에 부르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2013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순서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 강운태 광주시장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부르자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2015년 5월 17일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전야제에 참석해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김 대표는 결국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 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 시절 여당이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5·18 행사 참석을 위해 광주를 찾았다 봉변을 당했다. 2015년 5월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5·18전야제에서 주변 시민들로부터 물세례와 항의를 받고 행사장을 떠나야 했다. 당시 정부·여당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회피 논란과 더불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 문제로 광주 여론이 들끓었던 탓이다. 김 대표는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표로는 5·18전야제에 처음 참석했지만 수난을 면하지 못했다.

이후로도 보수 진영 정당의 광주행은 순탄치 않았다. 2019년 5월 18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5·18기념식이 열린 국립 5·18민주묘지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과 5.18 유족 등 수백 명이 황 대표 일행을 가로막고 거세게 항의했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5.18 망언'을 문제 삼은 시민들은 황 대표에게 해당 의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고, 황 대표는 20분가량 늦게 행사장에 입장했다. 거센 저항을 예상한 듯 침착한 자세를 유지한 황 대표는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 이해찬 민주당 대표 등과 나란히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2019년 5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을 위해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망언 의원' 징계 등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조화를 던지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김종인 전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020년 7월 19일 광주 북구 국립 5ㆍ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 영령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신군부의 국보위에 참여한 자신의 전력과 통합당의 5ㆍ18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에 대해 참회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 뉴시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희생자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봉변 또는 논란으로 점철돼 온 보수 진영 정치인의 광주행은 지난해 7월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무릎 참배'로 반전을 맞았다. 당시 김 위원장은 과거 자신의 신군부 국보위 활동을 포함해 당 일부 의원들의 5ㆍ18민주화운동 폄훼 발언에 대해 참회하며 추모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희생자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태인 학살을 사죄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보수당의 본격적인 '호남 구애'의 신호탄이 됐다.

보수 정치인들의 광주 방문은 올해 들어 부쩍 늘었고, 사죄의 진실성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듯 5·18 유족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 5.18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제에 초청돼 유족과 손을 맞잡았고, 18일 열린 41주년 기념식에서는 유족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불렀다.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초청된 성일종·정운천 국민의힘 의원과 김병욱·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함께 열사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송영길(왼쪽 두 번째) 민주당 대표와 김기현(오른쪽 두 번째) 국민의힘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18일 오전 5·18민주화운동 제4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앞서 광주 광산구 한 식당에서 5·18의 상징인 주먹밥을 먹고 있다. 뉴스1

오대근 기자 inlin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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