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성장이었어요"

김용출 2021. 5.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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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소설집 낸 김금희 작가
표제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은경과 기오성은 왜 헤어졌나' 물음에
"두 사람은 모두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첫 번째 수록작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황우석 사태때 여성의 몸에 대한 훼손
그땐 알지 못했던 사실 지금에야 직시"
또 다른 단편 '마지막 이기성'
유학생과 재일 한국인의 연애와 저항
같은 차별 놓고 다른 해결 방식 대비
독자와 평단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는 소설가 김금희씨는 이번에 펴낸 네 번째 소설집에서 다양한 회고와 기억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공감과 연대를 통해 그것을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 아닌 ‘성장과 전진을 위한 기억’으로 변주해낸다. 창비 제공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 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지난해 김승옥문학상 대상작이자 김금희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표제작인 단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화자인 ‘나’ 채은경이 20대 어느 날 기오성과 함께 노교수의 종택에서 족보 정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랑이 움텄다가 어긋나는 과정을 대면하며 성장해 가는 내용을, 이 같은 문장들로 담고 있다. 김 작가는 은경과 기오성은 왜 헤어졌을까, 라는 물음에 “두 사람 모두 서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은경은 그 문제를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묘한 삼각관계에서 자신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애정을 받지 못해 주변에 상당히 공격적인 노교수의 손녀 강선의 영향일까, 그것도 아니면 기오성이 자신과 강선 사이를 저울질한 것일까, 하는 여러 생각을 해보는 것이 이 작품이지요.”

은경의 회고는 어떤 과거 ‘결손의 확인’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거나 ‘성장의 확인’으로서 의미, 더 나아가 미래로 가기 위한 디딤돌일 수도 있어 보인다. 물론 이를 의도하고 기획해 가능하게 만든 건 작가일 터다.

“은경이 자기가 보는 젊음에 대해서 의미를 도출해주기를 바랐어요. 그때 정신없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럼에도 사촌이 산재를 당했을 때 기꺼이 도와준 마음을 간직한 채로 나이가 든 것이죠. 고택에서 걸어 나온 세 사람 가운데 세상을 냉소하고 신념이나 가치를 열광적으로 믿다가 손쉽게 폐기한 이는 기오성이고, 이데올로기로 생각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체험하며 쉽게 냉소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은경 아닌가 생각했어요.”

20~30대 젊은 독자들의 지지 속에 문학상에도 자주 호명되는 작가 김금희, 그는 어떻게 독자와 평단 모두를 사로잡았을까. 지난 14일 합정역 한 스튜디오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이번 소설집에는 2년여간 발표한 단편 7편이 담겼다. 그의 검은 마스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문학 열정을 감추는 데에는 실패했으니.

―제목이기도 하고 강선이 말하고 기오성과 은경이 각각 해석하는데,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기오성은 결국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 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건 기오성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어딘가 좀 불안한 얘였어, 라는 등 강선의 말을 부정이나 냉소의 표현으로 읽는다. 반면 은경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본다. 목적이나 꿈이 없다는 냉소가 아니라, 마음 안에 중요한 것이 있는데 너무 젊고 어려 그 에너지를 바로 쓸 수 없다는, 냉소적인 게 아니었어, 라고 대변한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어느 피자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 날 떠올렸다”며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그리고 아무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했지. 그렇게 해서 어떤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가능한 무른 마음을 갖는 여름이길 빈다”고 부연했다.

첫 번째 수록작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역시 2000년대 초 황우석 사건을 배경으로 대학 진학에 거듭 실패한 삼수생 주미와 의대에 입학했지만 적응에 실패한 ‘장의사’가 함께 보내는 어느 여름의 풍경을 회고한다.
“소설집에 2000년대를 돌아보는 작품이 많은데, 그때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진전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는 부문도 많았다. 여성 문제도 하나다. 황우석 사태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훼손, 난자 유린 등이 분명 있었는데, 당시 20대를 통과하던 저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지금에야 눈에 들어오더라. 어떤 급진적 애국주의와 결합해 이상하게 해결되는 과정에서 사실상 소외된 것이다. 황우석 사태를 배경으로 어떤 여성의 몸이나 젊음에 대한 훼손감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어려움과 아쉬움이 있지만 주미가 대학도 진학하고 스스로 걸어 나가는 등 뭔가를 넘어온 부문도 있고, 우리가 기성세대로 가고 있네, 하는 느낌으로 쓴 것이다.”

단편 ‘마지막 이기성’은 유학생 이기성과 재일 한국인 유키코의 연애와 저항 연대가 교차하는 소설이다. 대학 내에서 발생한 차별 문제에 대해 이기성은 시위를 벌이지만, 유키코는 캠퍼스 안에 배추밭을 만들어 가꾸는 것으로 항의한다.

“일본에 체류한 경험은 없고, 다만 여행을 자주 갔다. 배경 등이 취재가 됐다. 이 작품은 차별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른 게 핵심인 것 같다. 이기성은 일본을 떠나는 존재이니까 차별에 대해 확실히 드러내려는 방식이고, 유키코는 일본에서 계속 삶을 일궈가야 하기에 조심성이 있다. 유키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을 쓰고 싶었다.”

요컨대 김금희의 네 번째 소설집은 다양한 회고와 기억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을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 아닌 ‘성장과 전진을 위한 기억’으로 전변시켜내는 데 성공한 듯하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성공의 열쇠가 바로 안녕이라고 반복해 묻는 것이 상징하는 공감이자 연대라는 점일 것이다.

김 작가는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너의 도큐먼트’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소설집으로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2014), ‘너무 한낮의 연애’(2016),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2018), ‘오직 한 사람의 차지’(2019)를, 장편소설로 ‘경애의 마음’(2018)을 펴냈다.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그는 지난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후보작에 선정됐지만, 불공정 계약에 반발해 수상을 거부했다. 이상문학상은 결국 지난해 수상자를 발표하지 못했고, 주최 측인 문학사상사는 사과하고 불공정 논란이 불거진 계약 조건을 모두 수정한 뒤에야 올해 수상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상문학상 사태 이후 개인적으로 어떻게 지냈는지.

“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사도 많이 나왔지만, 매우 큰 사건이라서 개인적으로 힘들었다.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통이 오고 갖가지 매체에서 질문지를 보내오는 등 갑작스러운 관심 등으로 힘들었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한국의 작가 가운데 이상문학상을 받고 싶지 않는 작가가 있겠느냐. 계속 마감을 했다. 쓰다보니까 나아졌는데, 쉽지는 않았다.(더 큰 상을 주려고 시련을 준 것 아닌가) 그런 숨은 뜻을 몰랐다.(웃음)”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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