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문화프리뷰]

2021. 5. 18. 16: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간경향]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가 쓰고 신유청이 연출한 연극 〈그을린 사랑〉은 현대 중동과 캐나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극이지만, 연극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새롭게 다시 쓴 비극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근친상간이라는 충격적인 설정, 수수께끼를 풀면서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깨닫는 ‘앎’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그을린 사랑〉의 주요 모티브는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바로 뿌리를 잃은 세대가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 속에서 마주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다.

LG아트센터 제공


〈그을린 사랑〉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잔느가 ‘아버지를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캐나다에서 중동으로 떠나는 여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잔느는 먼저 나왈의 고향으로 향하고, 어머니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결국 자기 출생의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뒤늦게 합류한 쌍둥이 남매 시몽 역시 비슷한 여정을 겪으며 형에 대한 수수께끼를 푼다. 즉 처음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형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란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 나왈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잔느와 시몽, 즉 자신들이 어디서 왔고 누구의 자식인지를 알게 된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여정을 통해 또 하나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바로 중동계 캐나다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자기 뿌리 찾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극의 후반부에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잔느와 시몽이 자신들의 중동식 이름인 자나안과 사르완으로 불릴 때, 이들은 그동안 몰랐던 본명을 찾게 되고, 이를 통해 비로소 중동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둔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을린 사랑〉은 희곡이 원작임에도 불구하고 드니 빌뇌브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영화로 국내에 더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원작인 희곡의 언어와 장면을 거의 그대로 무대 위로 가져와 올린 신유청 연출의 연극은 영화와는 상당히 다른 언어와 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가 이 압도적인 비극의 서사를 레바논 내전이란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었다면, 연극은 동시대적인 현실비판보다는 나왈의 삶과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앎의 비극과 그 모든 비극을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강조한다.

극이 담고 있는 사건들의 어마어마한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대화보다는 독백, 사건보다 침묵에 더 방점을 찍으면서 고요하고 차분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평행을 이루며 흘러가던 이야기들이 교차하면서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 무대 위 인물들도, 객석의 관객들도 그 묵직한 진실의 무게에 눌려 말을 잃게 된다. 5월 25~30일, LG아트센터.

김주연 연극평론가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

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