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부적 [편집실에서]

2021. 5. 1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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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순간적으로 니들 생각이 나더라.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몸을 틀었지. 떨어지고 나서 보니 코피가 나더라고. 살았다 싶었어.”

고1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소식에 동생과 함께 병원으로 뛰어갔습니다. 병실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는 “나, 니네들 시집·장가갈 때까지는 안 죽어”라며 힘없는 미소를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전기기술자였습니다. 철탑과 전신주에 올라가 전기공사를 했습니다. 그날도 높은 곳에서 일하다 감전을 당했고, 균형을 잃고 떨어졌는데 천행으로 다리골절에 그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자식들 시집·장가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순도 되지 않는 나이였습니다. 사망원인란에는 다른 병질환이 적혔지만, 어머니는 “그때 감전사고 이후로 사람이 영 힘을 못 쓰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산재 후유증인 것이지요.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을 전후해 3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숨졌습니다. 모두 초등학생 어린 자녀가 있거나 고령의 부모를 둔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숨이 멈출 때 그들의 뇌리에는 어떤 생각이 스쳤을까요. 순순히 눈을 감을 수나 있었을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픕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앞두고 경제단체와 일부 보수언론에서 처벌이 너무 세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법규를 완화하는 데 국민의힘이 앞장섰고 더불어민주당은 응했습니다. 처벌수위는 낮아졌고, 산재사고의 20%를 차지한다는 5인 이하 사업장은 제외가 됐습니다.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시행도 3년 늦춰졌습니다.

지난 1월 법 제정 이후 산업현장의 안전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는 얘기,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솜방망이가 됐는데, 게다가 시행도 미뤄졌는데. 산업현장은 여전히 위험하고, 노동자는 계속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출산율이 낮아져, 인구가 준다며 걱정이 태산인 경제관료들이 산재로 인한 경제손실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아이러니합니다. 있는 인구마저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아이 태어나는 것을 걱정한답니까. 기업들이 규제를 부담스러워한다면 정부가 재정이라도 풀어서 산업안전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줘야 합니다. 낳지도 않겠다는 아이를 낳으라 강요하기 위해 쓴 돈의 몇십분의 일이면 충분합니다.

운전을 하다 저 멀리 철탑이 보이면 너무 일찍 떠난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오를 때마다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공구를 메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점퍼 속에 어머니는 몰래 부적을 넣어두시곤 했다고 합니다. 30년 전에야 산재 위험으로부터 노동자가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지만 세계 10대 경제국이 된 지금은 사회가 부적을 챙겨줘야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노동환경을 안전하게 만들어 더 이상 노동자가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그런 사회적 부적 말입니다.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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