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시대, '2진법 외교'를 넘어

박민희 2021. 5. 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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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단지 건설현장에 마련된 야외무대에서 열린 ‘K-반도체 전략 보고’에서 연설하고 있다. 평택/연합뉴스

[아침햇발]  박민희ㅣ논설위원

21일(현지시각)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대면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의 외교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백신 외교’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회담을 준비하는 실무진과 대사관, 기업들까지 나서 최대한 많은 코로나19 백신을 신속하게 확보하고, 한국 내 생산도 늘리는 성과를 내놓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 참여하고, 중국 견제 협의체인 쿼드와도 일부 협력을 추진하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 북핵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문 대통령이 취임 4주년 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조급해하지 않되 기회가 온다면 온 힘을 다할” 과제가 되었다.

백신 확보가 절실한 민생 문제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변화다. 하지만 ‘백신 외교’의 가시적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해 한국 외교의 청사진이 좌우된다면 본말이 뒤바뀌게 된다. 이번 회담은 수십년 만의 국제질서 대변환 속에서 한국이 장기 전략을 마련하고 치밀하게 준비해나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미국-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시작된 ‘중국 견제 시대’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이 주요 10개국(G10)에 걸맞은 역할과 발언권을 확보해나갈 설계도를 작성해야 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한국은 6월11일부터 영국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았다. 올 하반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열겠다고 한 ‘민주주의 정상회의’에도 참여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 등 기존 주요 7개국에 한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를 더한 주요 10개국 또는 ‘민주주의 10개국’(D10) 중심의 새 국제질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고, 한국이 이 흐름에서 어떤 역할을 해나가느냐가 앞으로 수십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 편 아니면 중국 편’ 식으로 어느 한쪽 강대국을 선택해 그 요구에 따라가는 외교에 머물러왔다. 스스로의 전략적 목표와 원칙을 정하고 국제사회의 복잡한 흐름을 면밀히 읽으면서 복합적으로 움직이는 외교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제 0과 1 두개의 선택지밖에 없는 ‘2진법’ 외교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여야만 다양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우선, 중국 정부의 대규모 지원을 받는 중국 국유기업들이 전세계 시장에서 불공정 경쟁을 벌이고 첨단기술 이전을 강요하는 데 대응할 국제규범을 만들려는 국제적 움직임에 한국이 함께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중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하며 중국과 거래를 끊으라고 했다. 어떤 미국의 동맹도 여기에는 동참할 수 없었다. 지금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 거래를 계속하되 중국의 불공정 행위는 막을 규범을 공동으로 만들자’며 틀을 바꿨다. 중국의 기술 침해와 경제적 압박을 우려해온 국가들에도 필요한 변화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이미 “중국처럼 무역을 왜곡시키는 정책을 지지하는 국가에 책임을 묻는 데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11월30일부터 열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는 중국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를 견제하려는 무역질서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북핵 문제 해결과 분단 극복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지만, 국제질서 변화의 큰 흐름과 맞물려 풀 수밖에 없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점진적, 실용적 해법’을 중심으로 양국의 공조를 강조하는 결과가 발표되겠지만, 지금 당장 북-미 대화의 큰 진전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국면이다. 미국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 이외에 다른 핵시설이나 핵물질, 미사일 등을 내놓기를 요구하고, 북한은 대북 제재의 대폭 완화를 비롯한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국제질서의 대전환이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의 바탕을 아예 훼손해버리지 않도록 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미-중 신냉전이 한반도 주변에서 양쪽의 군사력 증강 등 군비 경쟁의 악순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한국이 분명한 역할을 해야 한다.

대전환 속에서 한국 외교의 공간을 ‘북핵 문제’로 좁히지 말고, 국제사회의 주요 현안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발언권이 커질 수 있다.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이 주춧돌을 제대로 놓았는지가, 훗날 문재인 정부의 유산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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