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지원금, 20%만 떼고 드립니다'

한겨레 2021. 5. 1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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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는 경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상 나의 일상은 작은 민간 비영리 연구소 운영자가 해야 하는 다양한 일로 채워져 있다.

얼마 전에 전화를 받고 나눈 아래 대화도 이런 일상의 일부였다.

"대기업들은 인사팀이 전문적이고 인력도 많아 이런 일을 직접 하기도 하는데, 중소기업이나 작은 비영리기관은 쉽지 않지요. 그런 분들을 위해 저희가 해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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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이원재 ㅣLAB2050 대표

지면에서는 경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상 나의 일상은 작은 민간 비영리 연구소 운영자가 해야 하는 다양한 일로 채워져 있다. 얼마 전에 전화를 받고 나눈 아래 대화도 이런 일상의 일부였다.

“안녕하세요? 유연근무제를 신청하시면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알고 계신가요?”

“네, 뉴스에서 보기는 했어요. 그게 우리도 해당이 되나요?”

“그럼요, 재택근무만 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알아보고 신청해야겠네요.”

“그런데 그게, 직접 하시기는 정말 어려워요. 서류도 복잡하고요. 조건이 까다로워서 승인도 잘 나지 않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희가 약간의 수수료만 받고 도와드릴 수 있어요.”

“얼마나 드려야 하나요?”

“보통은 지원금의 30%를 받는데요. 저희는 특별히 20%만 받고 신청을 대행해드립니다.”

“그렇군요….”

“대기업들은 인사팀이 전문적이고 인력도 많아 이런 일을 직접 하기도 하는데, 중소기업이나 작은 비영리기관은 쉽지 않지요. 그런 분들을 위해 저희가 해드리는 겁니다.”

요약하자면, 중개인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부 지원금 신청 및 수령 과정을 대행해주고 지원금 중 20%를 받아가겠다는 이야기다. 연구원 세명에 불과한 우리 같은 곳에서야, 정보를 알기도 어렵지만 신청해 타내기도 여력이 부족한 터라 잠시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문득 번쩍 정신이 들었다.

‘20%라… 이런 식으로 지원되는 예산 중 20%라면 전체로는 얼마나 될까?’

유연근무 지원제도는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일자리 정책이다. 올해 일자리 예산은 30조원이다. 그중 얼마나 중개인들의 손에 들어갈까?

일자리 예산뿐일까?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농림축산식품부 등 부처를 가리지 않고 조건부 지원제도는 넘쳐난다. 올해 정부 예산은 550조원이다. 이 가운데 중개인들의 몫은 얼마나 될까? 거대한 시장이 이미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경제 전체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거대기업과 자산가들이 더 커진 힘으로 더 많은 것을 빨아들일 미래 사회에서, 정부의 역할이 커지고 지원정책이 확대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하지만 커진 정부와 조건부 지원정책이 얽힌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 될까?

이미 정부의 역할이 너무 커진 지역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저출생 고령화로 인구가 너무 많이 감소해 ‘소멸이 예상된다’고 지목된 지역들이다. 경북 영양군의 경우 지역 경제의 지방정부 의존율(지방정부 지출이 지역내총생산(GR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이른다. 소멸지수 높은 다른 지역도 만만치 않다. 전북 진안, 전북 장수, 전남 구례, 경북 울릉, 경남 남해군 등 많은 지역에서 지방정부 의존율이 60%를 넘는다.

이런 지역 경제에서는 당연히 지원제도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사업체가 많다. 정보와 네트워크가 있어 지원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사이의 격차가 점점 커진다. 이해관계자들의 단체가 지원사업의 중개인 역할을 하며 지역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들 단체와 좋은 관계를 갖지 않으면 지역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지금 일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미래에는 도시를 포함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커진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풀고 있는데, 지원 대상 자격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면, 중소기업이나 개인들은 그 지원을 얻기 어려워진다. 정말 필요한 사람보다는 정보를 취득하고 대응할 수 있는 사람에게로 혜택의 상당이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중개인이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만큼 우리 경제가 부담할 ‘수수료’도 커질 것이다. 정부 지원금을 타내는 데 많은 사람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사회가 역동적이거나 행복하기는 어렵다.

‘맞춤형’, ‘핀셋형’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정책을 설명하는 공직자와 전문가들은, 맞추고 핀셋 가져다 대느라 정책 예산의 20~30%가 중개인들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커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더 많은 사람이 생계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하고 활동하도록 뒷받침하는 일이 최우선이 아닐까? 그런데 자격을 정하고 까다롭게 따지는 복잡한 조건부 급여는 보통 사람의 자유는 줄이고 중개인의 기회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사회서비스와 같은 ‘조건 없는’ 제도에 자꾸 마음이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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