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올맨'이지만 '암욜맨'은 되고 싶어?

한겨레 2021. 5. 1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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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쿵쾅][내 이름은 김쿵쾅]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3월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면접 당사자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면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게 기득권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잖아요. ‘예민하다’는 말을 너무 신경쓰지 말고 오히려 칭찬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예민한’ 그가 <한겨레> 온라인 칼럼으로 독자를 찾아갑니다. 20대 여성인 자신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독서 경험을 엮어 낸 칼럼 ‘내 이름은 김쿵쾅’ 입니다.
※ ‘쿵쾅’은 단단하고 큰 물건이 서로 부딪칠 때 크게 나는 소리를 뜻합니다. 일부에선 성차별에 분노하고 성평등을 말하는 페미니스트를 가리켜 ‘쿵쾅이’라고 부릅니다. 페미니스트를 입막음 하려는 이들이 ‘쿵쾅’의 의미를 변형·독점하려는 시도를 ‘김쿵쾅’이라는 필명을 통해 유쾌하게 맞받아주려 합니다.

얼마 전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데 친구가 전화를 했다. 6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졌단다.

사정은 이렇다. 둘이 산책을 하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서 스마트폰 지도로 근처 편의점을 찾았다고 했다. CU와 GS25가 둘 다 있었다. 이어진 그들 사이의 대화.

친구 : “나는 GS25 불매 중이니 CU에 가자.”

친구의 전 남자친구 : “페미 손절한 GS25에서 사줘야지. 너도 페미들 같이 피해망상이 있는 줄 몰랐네.”

친구의 전 남자친구는 이어 화까지 냈다고 했다. “모든 남자가 다 정준영, 조주빈 같은 건 아닌데 왜 ‘멀쩡한’ 남자들까지 범죄자 취급하는거야!”라고.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그자리에서 즉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친구의 전 남자친구는 일주일 동안 친구의 자취방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자기가 잘못했으니 다시 만나자고 빌었다고 한다. 낫올맨(not all man·모든 남자가 ○○는 아니다)이라며, 암욜맨(I’m your man·나는 너의 남자다)이 되고 싶다고 했단다. 친구는 단 한마디만 했다고 전했다. “안돼, 돌아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1961년 4월11일, 한 남자가 예루살렘 법정에 들어왔다.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잔혹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모든 공익은 사익에 우선한다’라는 나치 정권의 기조아래 ‘합법적’인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그가 잔인한 범죄에 가담한 데는 엄청난 동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아이히만을 본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것이 바로 악(惡)이다.” 아렌트는 악이란 어떤 대단하거나 그럴듯한 것이 아닌, 아주 진부하고도 평범한 것이며, 그 평범한 악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 타인의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무관심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는) 아이히만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과정에 있었던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러한 주장은 독일인에게 큰 반감을 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 있기 전까지는 히틀러, 아이히만, 괴벨스와 같은 사람만 악마라 부르고 처형하면 나머지 독일인은 일종의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렌트의 주장대로라면 유대인 학살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수많은 독일인은 모두 ‘유죄’였다.

독일인의 반발을 보고 아렌트는 말한다. “학살당하는 유대인을 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변화의 목소리를 내지 않은 사람, 이러한 대학살이 일어나는 중에도 그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즉 타인의 고통에 관심 가지지 않은 모두의 마음 속 한 부분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히틀러와 아이히만, 괴벨스 만을 악마로 몰아가 면죄부를 받으려던 독일인들의 모습. “나쁜 건 정준영, 조주빈인데 왜 나까지 범죄자 취급하냐”고 말하는 사람들과 겹쳐보인다. 아렌트는 주장을 처음 펼칠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주장은 이제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특이한 주장이 아닌 보편성을 띤 ‘도덕’에 가깝다. 그리고 세계 시민들은 전후 독일이 보여준 모습을 높이 샀다. ①비록 자신이 직접 유대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 ②피해자에게 공감하지 않는 자는 시대를 넘어 모두 유죄라는 인식의 공유 ③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인적, 사회적 측면에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말이다.

역사를 대하는 독일의 이런 태도에 단 한 번이라도 고개를 끄덕인 적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런 당신이라면, 모든 시민이 노력해 각종 여성 대상 범죄를 예방하자는 이야기에 대고 “왜 나까지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냐”고 화낼 게 아니라, 전후 독일의 태도를 본받아야하지 않겠냐고.

‘낫올맨’이지만 ‘암욜맨’은 되고 싶다는 친구의 전 남자친구야, ‘암욜맨’ 그 노래 수능 금지곡인 거 알지? 응, 너도 금지.

※ ‘암욜맨’은 SS501의 노래 ‘U R MAN’의 후렴구인 ‘아임 유얼 맨’(I’m Your Man)을 소리나는 대로 줄여쓴 말이다. 이 후렴구는 한 번 떠올리면 계속 머릿속에 반복 재생돼 수능시험 볼 때 떠올리면 안 되는 대표적인 ‘수능 금지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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