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길 돌옹벽 위 '파격', 참언론 파수꾼들의 성채

노형석 2021. 5. 1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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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동지와 함께 찾은 한겨레가 자란 공간들 (하)

소외층·서민과 더불어 '공덕동 사옥'
조건영 설계와 만나 진보정신 관통
언론뿐 아니라 도시건축사 새도전
"시민사회 유산, 미래 쓰임새 고민을"
1987년 10월30일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선언대회의 모습. 행사가 열렸던 대강당은 개축돼 사라지고 상가가 들어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형수 전 대표이사가 11일 낮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건물의 얼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발송장 출입구가 나 있는 사옥 앞부분은 건립 공사 전에는 높은 옹벽으로, 그 위에 문 닫은 공장과 자재들이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서 전 대표는 건립의 모든 과정에 일일이 관여하며 공덕동 사옥의 산파역을 맡았던 이다. 노형석 기자

“여기 터에 서서 삼십분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아요.”

건물을 살펴본 풍수학계 권위자가 말했다. “땅의 기가 너무 세다”는 말이었다.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집 자리 땅속 깊은 곳에 엄청난 물길이 지나고 있네요. 그 기가 보통 거센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게 여기서 지내려면 ‘외부에 적을 만들어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더 센 기운으로 땅기운을 눌러야 해요. 신문사 정도라면 견딜 만한 터라 생각하지만….”

서형수 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는 1991년 연말 공덕동 사옥이 완공된 직후 풍수사상가인 최창조 당시 서울대 교수가 건물을 돌아보고 남긴 얘기를 또렷이 기억했다. 그해 12월14일 서울 도심 권역 바깥 언덕배기 동네 공덕동에 한겨레 사옥이 들어선 것은 도시건축사에 회자될 만한 사건이었다.

1970년대 서울 공덕동 로터리. 왼쪽 11시 방향으로 난 길이 만리재길이다. 서울시정 사진 아카이브

공덕동은 100년 넘는 거주 역사를 지닌 서민 동네였다. 서울역 서쪽 고개 만리재를 넘어 공덕동 교차로로 이어지는 2.2㎞의 만리재길이 지나가는 근처 언덕배기에 20세기 초부터 사대문 안 도심에서 밀려난 소외 계층이 몰려 들었다. 공장에서 일하거나 품팔이 등으로 연명하는 노동자, 빈민들이 토막, 판잣집 등의 가건물을 지어놓고 살았다. 한겨레 사옥이 막 건립될 당시인 1990~91년에도 터 주변은 낡고 부실한 재래식 가옥들로 가득했고, 차량이 드나들기 힘든 좁은 골목길들만 있을 뿐이었다. 서형수 전 대표는 회고했다. “공덕 교차로에서 사옥터까지 오는 길에는 오르막 내리막이 물결치듯 되풀이되는 둔덕들이 여러 개였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다 깎아냈지만. 교차로에서 언덕마루 기슭의 사옥까지 시각적 거리감이 꽤 컸어요. 집집마다 화장실도 개량이 안되어서 1990년대 초까지 배설물을 치우는 트럭이 올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낙후된 동네였지요.”

1970년대 찍은 만리재길. 만리재에서 공덕동 교차로에 이르는 도로 모습이다. 도로는 1972년 만리로로 명명된 뒤 74년 현재 모습으로 확장됐다. 40여년 전 도로 주변의 능선과 언덕배기에는 오래된 빈민과 서민의 가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아파트 빌딩 숲으로 변한 풍경과 전혀 달랐던 달동네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정 사진 아카이브

100여년 전 구한말에는 고양군 공덕리였다. 고종황제의 비 명성왕후를 일본 낭인들이 시해한 을미사변의 주요 공간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사변 뒤 집권한 흥선대원군 별장 아소정 터로 유명했다. 일본 낭인들은 경복궁에서 황후를 시해하기 전 거사 명분을 삼기 위해 은둔하던 대원군을 공덕리 아소정에서 설득해 데리고 나왔다. 그때 대원군을 수행하며 남대문 가던 길목을 지금 사옥 앞을 지나는 만리재길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공덕리 넘어 만리재 인근의 청파 언덕, 효창원 부근은 일본군이 19세기 말 조선 강점을 위해 천막을 치고 군마를 방목했던 주둔지이기도 했다.

이런 험난한 내력과 입지를 지닌 곳에 사옥이 들어선 건 국민주 모금으로 성사된 창간만큼이나 기적적이었다. 언론사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지형 조건을 딛고 한국언론사에 새 도전을 상징하는 파격적인 건축 디자인을 실현한 것이다.

1991년 마무리 공사 중인 공덕동 사옥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설계자는 조건영(75). 1980년대 초 광주항쟁의 진실을 국내외에 알리다 공안당국에 붙잡혀 고초를 겪은 민주화운동가였다. <한겨레> 창간 준비 작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문화판에서 두주불사의 괴짜로 유명했던 개성파 건축가가 숙명처럼 사옥 건축을 맡았다. 경기고 선배로 막역했던 당시 개발본부장 정태기는 작가의 자유 의지대로 지어보라며 형식과 스타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난 사옥은 그의 말마따나 80년대 한국 사회변혁운동을 관통했던 ‘반역의 정신’이 효모처럼 피어오르며 덩어리로 물화된 산물이었다. 평지에 반듯한 상자형 빌딩을 짓던 기존 언론사옥의 굳은 관행을 깨어버렸다. 빈민들이 모여 살던 언덕 기슭의 방치된 공장터에 지하 2층, 지상 4층, 연면적 6714㎡(2031평) 규모의 번듯한 본체를 올렸다. 외양은 날카로운 기하학적 이미지와 라운드형의 유연한 곡면이 공존하는 디자인을 표방했다. 지탱하는 구조체(기둥)와 벽체를 따로 기능하게 하는 스위스 출신 건축거장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근대적 건축 원칙을 바탕에 깔고 설계된 이 건물은 르 코르뷔지에의 담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작가의식을 보여주었다. 각진 뼈대가 부드러운 곡면의 몸체를 뚫고 튀어나와 기립한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건축 디자인을 창조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부드러운 곡면부 본체가 주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단단한 격자형 뼈대가 건물을 받친 것이 시각적으로 도드라진 ‘외유내강’의 건물이 됐다.

1991년 12월 완공 무렵에 찍은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11일 오후 답사팀 일행은 만리재 고갯마루 아래의 공덕동 사옥에 도착했다. 양평동 창간사옥 터를 돌아본 뒤 마포대로를 거쳐 가는 길에는 차창 밖으로 만리재길 양쪽을 가득 채운 빌딩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높은 빌딩이 거의 없었으나 한겨레 사옥 옆에 삼성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을 신호탄으로 2000년대 이후 업무용 빌딩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사옥 앞에 서서 건물 정면부와 그 앞길을 먼저 훑어본다. 길가에 면한 사옥 정면엔 정문이 나 있지 않고, 신문 발송장 출입구만 있을 뿐이다. 정문은 측면 계단을 통해 3층 테라스로 올라가야 나타난다. 한겨레 사옥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둥그런 라운드형의 구조물과 격자형 뼈대로 이뤄진 사옥의 핵심 본체는 3층 부분에 얹혀져 있다. 왜 이런 얼개를 하고 있을까? 사실 한겨레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터의 열악한 입지였다. 사옥 정면을 올려다보면서 서 전 대표가 건립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지방에 신문을 보내야 하니) 서울역에서 가깝고 평당 값이 싼 곳을 찾다가, 결국 이곳이 낙점된 겁니다. 발송장이 있는 사옥 정면부는 그냥 옹벽이었어요. 그 위에 있던 망한 공장 터 800여평에 사옥 본체가 들어선 거죠. 옹벽을 헐고 파내어 지하 주차장을 만들려 했으나 암반이 드러나 포기했습니다.”

조건영의 한겨레 사옥 설계도면을 재현한 모형.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국 현대건축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취지로 열렸던 기획전 ‘종이와 콘크리트’에 출품됐을 때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근처엔 자전거나 소형 차만 편도로 겨우 다니는 작은 길만 있었다. 건물 완공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옥 앞에서 효창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일방도로가 뚫렸다. 김형배 전 논설위원은 “화재에 대비해 소방차가 들어갈 만한 도로를 내는 게 시급했다. 당시 고건 서울시장이 배려해서 효창공원 쪽에 직결되는 소방도로를 따로 내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떠올렸다.

사옥이 자리잡은 뒤 공덕동 일대엔 도시 공간의 격변이 일어난다. 만리재로 길가는 주택촌에서 업무 타운으로 변했다. 아울러 만리재로에서 사옥 앞을 지나 효창공원, 청파동으로 가는 직결 통과도로가 만들어졌다. 공덕동과 능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청파동 효창공원은 고샅길 외엔 도로로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사옥 건립으로 이런 도심 외곽의 공간구조에 큰 변화를 만든 셈이었다. 물론 1991년 완공 당시와 지금 사옥은 많이 다르다. 폭증하는 업무와 인력을 기존 사옥이 감당할 수 없어 1996년 지상 8층, 연면적 1만2201㎡(3691평) 규모로 증축했다. 1999년엔 사옥 오른쪽 측면에 라운드형 신관을 따로 붙였다.

3층 테라스 정원으로 올라갔다. 건립 당시엔 삼각산 봉우리와 청와대를 포함한 그 일대 풍경이 모두 눈에 들어왔었다고 두 사람은 귀띔했다. 김형배 전 위원은 말했다. “사옥의 본체는 성채나 포대 같은 인상을 주죠. 건립 당시 전면으로 청와대와 북악산 일대가 다 보였으니 건축가가 권력 감시의 뜻을 담아 건물 형상과 구도를 만들었을 거라 봐요. 참호 포구 같은 창도 뚫려 있어요. 다양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공덕동 사옥은 한국 언론운동사의 자취를 간직한 몇 안 되는 건축유산이다. 1980년대 한국 시민사회 운동의 성과를 유일하게 실물화한 성과로 꼽히는 이 건축물을 장래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인우 한겨레 제작국장은 “신문이나 인쇄물을 계속 찍어내는 살아 있는 언론박물관”을 주문했다. 건축사가인 김종헌 배재대 교수는 “진보정신을 실제 건축에 구현한 조건영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미래의 문화 이슈를 제기할 수 있는 새 개념 공간을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들어올 수 없는 곳에 들어선 집이니 활용 방안 또한 상식을 깨는 지평에서 논의되지 않을까. 공덕동 사옥의 미래는 과거 한겨레 공간들의 역사처럼 치열한 논쟁과 고뇌를 예고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창간 발기인대회 연 명동 YWCA연합회관, 지금은 의류매장으로


지난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 이름도 ‘페이지 명동’으로 바뀌고 내부 구조도 대폭 바뀐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회관의 최근 모습. 원형과 달리 앞쪽에 돌출부 공간을 틔운 것이 눈에 띈다. 노형석 기자

지난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 이름도 ‘페이지 명동’으로 바뀌고 내부 구조도 대폭 바뀐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회관의 최근 모습. 원형과 달리 앞쪽에 돌출부 공간을 틔운 것이 눈에 띈다. 노형석 기자
와이더블유시에이 회관 1층에 들어선 의류 할인매장. 노형석 기자

1987년 6월 항쟁의 무대였던 서울 명동은 <한겨레>에도 특별한 역사적 공간이다. 그 인연은 1987년 10월30일 명동성당 맞은편에 있는 한국기독교여성청년회(YWCA) 연합회의 서울여자기독교청년회(서울YWCA) 대강당에서 열린 창간발기인대회로 맺어졌다. 국민주 언론의 출범 사실을 세상에 처음 공포한 현장이었다. 1979년 11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재야인사들의 위장결혼식 시위가 일어났던 민주화운동 사적지로도 알려져 있다. 1988년 4월 노태우 정부가 한겨레신문사 설립 허가필증 교부를 미루자 빨리 필증을 내달라고 기자와 직원들이 몰려나와 포효하며 거리시위를 펼쳤던 곳은 명동성당 앞 언덕길 일대였다. 하지만 3000명 넘는 창간발기인들이 한겨레신문의 노래를 불렀던 대강당 현장과 등록필증 교부 시위를 벌였던 추억의 언덕길은 지금 찾아볼 수 없다.

연합회 회관은 중앙대 본관을 설계한 건축가 차경순(1916~1974)이 1968년 설계해 완공한 모더니즘 스타일 건물이다. 이 회관 뒤쪽에 붙어있던 서울여자기독교청년회 대강당은 도심에서 대형 행사가 가능한 드문 공간이어서 각종 시국·문화·종교행사와 결혼식장으로 애용됐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개축을 거치면서 대강당은 사라졌고, 지난해 대규모로 리모델링되면서 건물 이름을 ‘페이지 명동’으로 바꾼 연합회 회관 안에는 의류매장이 들어섰다. 명동성당 앞 언덕길은 노동자, 도시빈민의 단골 농성장이었지만 2010년대 이후 대규모 개축에 따라 각진 계단통로로 바뀌었다. 재야단체, 통일운동단체의 집회나 회합이 숱하게 열려 한겨레 기자들의 단골 출입처였던 회관 아래 향린교회도 곧 재개발로 떠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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