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존의 窓] ‘깊고 푸른 밤’에서 ‘미나리’까지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 前 주태국 미국 대사 2021. 5. 1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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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윤여정 배우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작년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을 때 온 국민이 느꼈던 전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작년 아내의 문자메시지로 ‘기생충’의 수상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는 함께 회의 중이던 직원들에게 이를 알렸고, 회의실은 순식간에 기쁨의 탄성으로 가득 찼다. 올해는 비록 대면 회의가 아닌 화상회의 중이었지만 작년의 황홀했던 순간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최근 한국 영화계의 쾌거를 되새기며, 과거 한국 영화와 쌓아온 추억과 함께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돌아보고 싶었다.

/일러스트=이철원

먼저 작년 아카데미 수상으로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생각했다. 서울 한 극장에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극적인 스토리 전개, 카메라 워크, 그리고 음산한 배경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 처음 접한 송강호 배우의 연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는 언제 봐도 멋진 최민식 배우, 그리고 늘 변화무쌍한 유해진 배우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되었다. 이후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는 ‘괴물’과 ‘설국열차’에서 호흡을 맞추며 한국 영화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콤비로 자리 잡았다. 작년 미국에서 ‘기생충’이 처음 개봉했을 때 이 콤비가 합을 맞춘 작품들을 소개하며 미국인 친구들을 한국 영화에 입문시키기도 했다.

봉 감독의 과거 명작들을 반추하다 보니 내가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1984년까지 기억이 거슬러 올라갔다. 그 자체로 미술 작품이었던 당시의 대형 극장 간판들은 지나가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아 세울 만큼 화려했다. 서울에서 보내는 첫 주말에 시내 구경을 하던 중 나는 한 극장 앞에 서서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이라는 문구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한국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몇 분이 지난 후에야 그 문구가 영어 원제를 한국말로 그대로 음차하여 옮겨 놓은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 옆에 서구적인 외모에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바로 한국인 미술가 손끝에서 재탄생한 배우 숀 코너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한국어로 쓰인 영화 제목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며 고민하던 나를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한국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깊고 푸른 밤’이었다. 영화관에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오징어 구이 냄새가 처음에는 무척 강렬하게 느껴졌다. 익숙해지고 나니 이제는 미국 극장의 팝콘과 나초 치즈 냄새가 너무 느끼해서 견디기 힘들 정도다.

지난 35년 한국 영화사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변천사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1980~90년대 주한 미국 대사관에 근무할 때 한국 정부가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힘썼던 기억이 있다. 공정한 경쟁의 장이 열리면 미국 영화가 유입될 뿐 아니라 한국 영화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스크린 쿼터제 유지를 주장하던 이들은 할리우드 영화가 대량으로 유입되면 한국 영화 산업을 잠식할 것이라며 반발했지만 결국 쿼터제는 폐지됐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영화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한국 감독들은 아주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강렬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냈다. ‘기생충’이 좋은 예다.

미국 관객들 눈에는 한국 어머니들의 치열한 교육열, 부잣집에서 일하는 운전기사와 가사 도우미의 모습, 그리고 짜파구리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적 장벽을 넘어선 ‘기생충’의 성공을 보면, 봉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인용했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한 영화계 거장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앞으로도 한국이 다양한 부문에서 고유의 정서와 개성을 드러낼수록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할 것이다.

연이은 아카데미 수상으로 입증되는 한국의 저력을 볼 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한국의 매력 두 가지를 꼽아보고자 한다. 우선,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감에서 내가 수차례 미국인 친구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던 한국인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를 엿볼 수 있다. 성공에 너무 목매지는 않되 인생이 때때로 던지는 고난을 재치 있게 넘어서는 한국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나를 자꾸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매력 중 하나다. 이와 더불어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가 몸소 보여준 성실함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둘은 국내 영화인이 해외 진출을 감히 꿈꾸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능력을 갈고닦은 끝에 결국 국제 무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지금의 한국은 영화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앞서 말한 삶을 대하는 의연한 태도, 그리고 창의성을 겸비한 탁월한 기술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한국이 보여주는 창의성과 기술의 놀라운 결합은 내가 현재 속해 있는 회사뿐 아니라 여러 외국계 회사가 한국에 R&D 센터를 세우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윤여정 배우와 봉준호 감독이 이룬 쾌거는 개인적 성취일 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우리 모두의 위상을 드높여주는 일이다. 진심을 다해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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