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한 日, 질병 관리 명분 내세워 노골적으로 통제 강화

강구열 2021. 5. 1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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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질병 관리의 사회문화사'
2차대전 패배 후 흩어진 일본인 귀환
혼혈아는 순수혈통 오염 존재로 여겨
부인건강상담소 설치해 강제로 낙태
한센병 환자들은 일제에 격리 자청
낙인·차별 강해 마지막 선택지가 돼
강제노동·학대 시달려 공격적 저항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권력이 구성원 개개인을 대상으로 강력하고, 세밀하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새삼 확인시켰다. 특정 시간대, 특정 인물의 움직임이 공개됐고, 예전엔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여겼던 이동의 제한이 실제로 가능함을 보여줬다.

권력이 이런 속성을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시절이 머지않은 과거에 있었다. 건강, 생명을 지킨다는 명분을 전제하는 것이라 권력을 견제하는 시스템 또한 평상시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신간 ‘질병 관리의 사회문화사’에 실린 두 편의 글을 이런 시각에서 읽으면 꽤 흥미롭다.

◆여성 귀환자에 대한 검역, 전후 일본의 망상

‘제국의 흔적 지우기: 패전 후 일본에서의 귀환자 검역’(옥스퍼드대 김정란 연구원)은 아시아 각 지역에 살다 2차 대전 패전 직후 일본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 당시 일본을 지배한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인식과 정책을 분석하며 여기에 내재한 권력의 속내를 파헤친다.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을 기준으로 약 690만명의 일본인이 식민지, 점령지, 전쟁터 등 해외에 산재에 있었다. 종전과 함께 이들이 귀국함에 따라 특히 걱정을 산 것이 귀환자들에 의한 감염병의 유입, 전파였다. 험난한 귀국 여정 등으로 귀환자들이 실제 각종 질병을 앓고 있던 게 현실인지라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귀환자들 대부분이 살았던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질병의 온상’으로 여겼던 SCAP의 ‘감염병학적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2차대전 항복 선언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일본인 귀환자들이 부산항에서 배에 탄 채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일본 정부와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귀환자들에 의한 감염병의 유입을 크게 걱정해 검역을 강화했다. 이화여대 출판문화원 제공
검역소는 1945년 9월 주요 항구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귀환자들은 이곳에서 일련의 절차를 통과한 후에야 목적지로 떠날 수 있었다. 검역원들은 먼저 출발지에서 발행한 건강검진표, 출발지의 감염병 유행 유무를 확인했고, 선내에 감염병 환자 유무를 파악했다. 감염병 환자나 의심 환자는 격리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4일간 배에 머물렀다. 이런 절차를 마치고 입항이 허락되면 DDT 소독이 이뤄졌다. DDT는 검역소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학교와 작업장, 역 등에서 주기적으로 살포됐다. DDT 분말을 뒤집어쓴 모습은 패전국 일본의 이미지와 겹쳤으나 실제 효과는 커서 그것을 공급한 미국을 “일본인들의 ‘더럽고 병든 몸’을 씻겨내는 ‘구원자’로서 시각화하기도” 했다.

귀환자 중 여성을 대상으로 성병과 부인성 질환의 검사, 치료를 실시한 것은 “공중보건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본을 재건’하는 데도 걸림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항구 2곳에 부인건강상담소를 열어 임신한 아이가 혼혈임이 확인되면 낙태를 시킨 것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었다. “전후 일본 사회는 대륙에서 돌아온 여성들의 복중 혼혈 태아를 미래의 일본인종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김정란 연구원은 “전후 일본 사회는 새로운 단일민족 국가로 재탄생하기 위해 전념했다”며 “따라서 혼혈 아동은 제국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순수한’ 혈통을 오염시키는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라고 밝혔다.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 격리를 자청한 이유는

질병으로 앓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소외,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센병 환자가 대표적이다. ‘식민지기 한센병 환자를 둘러싼 죽음과 생존’(한국방송통신대 김재형 교수)의 글은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이 직면했던 비참한 현실, 이들과 권력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차별, 멸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제법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한센병 환자는 무서운 전염원이자 치안의 문제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묘사되었다”고 정리했다. 이들을 더욱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한센병이 불치라는 인식이었다.

가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지독한 차별을 당했던 이들은 1920년대 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단체를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1930년부터는 대구, 부산, 여수의 단체들이 전국 단위로 활동하며 조선총독부 등에 구제책을 요청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센병 환자들이 자진해서 1916년 소록도에 설립된 병원에 격리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일제의 정책에 따라 강제로 격리당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사실이다. 김 교수는 “실제로는 사회에서의 낙인과 차별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치료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던 환자들에게 나시설은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선택지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일상적인 폭력과 죽음의 공포, 구걸로 연명해야 하는 비참한 현실, 주기적인 경찰의 단속과 추방 등에 시달리던 이들이 소록도라는 격리시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에게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지였지만 조선총독부가 용인하고,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기도 한 그곳의 현실 또한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제노동, 외부 지원 축소, 환자 증가, 헌금 명목의 갈취 등이 만연하면서 1920년대 1%를 조금 넘던 환자 사망률은 1940년대에 이르러 7.2%까지 치솟았다. 단종과 낙태수술도 임의로 이뤄졌다.

이런 현실에 한센병 환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했다. 탈출은 소극적인 것이었고, 직원에 대한 공격은 적극적인 것이었다. 1942년 6월 환자 이춘상이 소록도갱생원 스오 마사스에 원장을 살해한 사건은 저항의 가장 적극적인 사례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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