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못 없이 도끼 하나로 '뚝딱'.. 80여개 중세 목조건축물 간직한 명소

2021. 5. 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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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종탑 중심 키지 박물관 형성
19세기 후부터 큰 지역 마을 이뤄
예수변모교회만의 '특별한 자부심'
돔·지붕 제외 몸체엔 못 사용 안해
이콘화 등 뛰어난 내부 장식 눈길
소리꾼 이리나 페도소바 섬 출신
러 민속문화의 보고 중요성도 지녀


키지 포고스트의 경관은 여러 개의 양파형 돔으로 이뤄진 예수변모교회와 성모중보교회, 종탑의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키지섬은 길이 5.5㎞·최대 폭 1.5㎞로, 비교적 작은 크기임에도 명소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은경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③ 유라시아 역사문화 탐방 -  카렐리야 공화국의 키지섬(8)

러시아 북서부에 위치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오네가 호수는 165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하나인 키지(Kizhi)섬은 길이 5.5km에 최대 폭이 1.5km로, 비교적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명소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섬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라 할 만큼 이곳에는 80여개에 이르는 수많은 중세 목조건축들이 남아 있다. 오네가 호수의 변화무쌍한 기상 탓에 여름철 정해진 날짜에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제한적인 이곳은 러시아인이 자랑하는 관광명소이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키지섬은 러시아 북부 카렐리야 공화국의 수도인 페트로자보드스크에서 6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페트로자보드스크는 '표트르의 공장'이라는 명칭으로, 18세기 철광석이 필요했던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1941년부터 1944년 사이에는 핀란드의 영토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키지섬에 발틱-핀란드족이 거주했지만, 11세기부터는 노브고로드의 보야르(최고위 귀족)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노브고로드의 영향으로 지금의 러시아 북부 지역에 기독교가 널리 퍼졌으며 15세기부터 키지와 노브고로드의 영토가 모스크바 공국에 편입되었다. 16세기 키지는 자오네지예의 문화 중심이자 130개의 마을로 이뤄진 스파스 포고스트의 행정 중심이 되었다.

키지라는 명칭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벱스어(Veps language)로 키즈(kiz)가 '저수지 바닥에서 자라는 이끼'를 뜻한다고 하며, 또 다른 역사가들은 역시 벱스어로 키시(kisi)가 '오락회', '놀이마당', '축제의 장'을 뜻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봤을 때 고고학자들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이곳에서 이교도들의 제례 의식이 열렸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키지는 예로부터 야금(冶金)으로 유명했으며 1669년 이곳에 구리 광산이 발견되면서 제련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일에 노브고로드의 거부였던 세묜 가브릴로프가 오래전부터 참여했으나, 완수하는 데에는 네덜란드에서 이주해온 마르셀리스(P. Marselis)와 덴마크의 외교관이었던 부테난트(H. Butenant) 등 외국 자본의 도움이 컸다. 이를 시작으로 공장 세 곳이 더 건설되었고, 17세기 말에는 5개의 기업체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이곳 공장들은 애초 구리 제련을 목적으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수익성이 낮다 보니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주 북서쪽에 있는 티흐빈 포사드(posad, 도시 외곽의 상공업 지역)는 17-18세기 경제 호황을 맞이하면서 주변에 있던 키지의 수공업을 동반 부흥시키는데 일조했다. 이곳의 수공업품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고 티흐빈의 대장장이들이 만드는 제품은 러시아의 각 도시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구입할 만큼 큰 수요가 있었다. 티흐빈은 그 무렵 러시아의 대외 무역이 이루어지는 지점이었으며, 티흐빈 시장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 중 하나로 성장했다. 17세기의 무역과 공예의 번성은 티흐빈의 영토가 커지고 성장하는 데 이바지했다. 17세기 티흐빈 시장에서 이미 키지산(産) 칼은 가장 인기 있는 상품 중 하나였다.

16세기 말까지 키지섬에는 14개의 정착촌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얌카와 바실리예보 두 곳만 남아있다. 이곳은 키지 박물관의 일부가 되었다. 키지 박물관은 처음에는 예수변모교회(프레오브라젠스카야 교회)와 성모중보교회(포크롭스카야 교회), 종탑 등 3개의 건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여기에 작은 예배당과 주택, 생활 도구 및 헛간, 사우나, 온실 등 별채가 추가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이와 같은 대부분의 역사적인 건물은 자오네지예의 여러 지역에서 다년에 걸쳐 옮겨온 것이었고, 그리하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제법 크기가 큰 지역 마을이 형성되었다.

키지 포고스트(pogost)의 경관은 여러 개의 양파형 돔으로 이뤄진 예수변모교회와 성모중보교회, 종탑의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이곳은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포고스트(pogost)'는 정착촌의 명칭 뒤에 붙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과거에는 여러 마을로 이루어진 행정적, 지역적 단위의 정착촌을 지칭했으나 오늘날에는 벽지 농촌 교회와 묘지의 조합을 지칭한다. 키지 포고스트 역시 이곳의 교회 뒤편으로 작은 묘지가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포고스트는 대개 땅에 담이나 울타리로 경계선을 쳐서 외부인의 이용을 막는데, 키지 포고스트를 에워싸고 있는 담장은 두 채의 교회와 종탑을 포함하고 있다. 1959년에 재건된 300미터 길이의 담장에는 망루와 문이 있어 역사적인 요새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거대한 통나무 구조물과 맞배지붕은 웅장함을 더해준다. 중앙의 양쪽문은 성모중보교회 근처 서쪽에 있다. 담장의 중심부에는 널판으로 이뤄진 덧문의 창이 있고, 구석의 탑은 조각한 첨탑이 장식하고 있다.

이곳의 특별한 자부심은 북유럽 최고의 목조 건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 건물 목록에 포함된 예수변모교회이다.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수변모교회는 1694년 화재로 소실된 샤트로바야 교회 부지에 1714년에 세워졌다. 6층 구조의 통나무로 지어진 이 건물은 길이 29미터, 폭 20.6미터, 높이 37미터의 규모이며 다층의 경사진 지붕에 설치된 22개의 크고 작은 양파형 돔으로 장식되어 있다. 22개의 돔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숫자 13과 9품(九品)으로 나뉜 천사계급의 합으로, 정교의 교회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물게 많은 돔 숫자를 자랑한다. 놀라운 사실은 복잡한 구조와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돔과 지붕의 널(wood plate)을 제외한 몸체에는 단 한 개의 못도 사용되지 않았고 오직 도끼 하나만 사용하여 지었다는 점에 있다. 교회 지붕을 감싸고 있는 작고 얇은 나무 편들은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이는데, 돔의 이 '비늘'을 고정하기 위해서만 작은 못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곳은 난방시설이 없어 동계 기간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여름 교회'로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이 교회를 지은 목수 네스토르는 작업을 끝내고 가장 높은 돔에 붉은 리본을 묶고 도끼를 오네가 호수에 던지며 '이와 같은 멋진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섬의 독특한 지형과 관련이 있다. 오네가 호수는 빙하기를 벗어나던 만 이천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그와 같은 흔적이 키지섬에서 발견된다. 섬에는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녹으면서 형성된 분화구들이 발견되며, 그중에는 최대 3m 깊이에 이르는 것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분화구 중 하나에 한 젊은이의 집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관습과는 달리 환락파티를 즐겼고 그 죄에 대한 형벌로 집이 무너졌다. 이때 두 명의 소녀에게만 빨리 집을 버리고 도망치라는 환상이 보였다. 그들은 이 말에 순종하고 집을 나섰지만, 집에서 멀어질수록 호기심이 더욱 그들을 사로잡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두 소녀는 떠나온 집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자마자 그 즉시 전나무로 변했다. 그리하여 소녀들은 지금도 섬에서 두 그루의 전나무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러시아 뉴스 통신은 1999년 전 핀란드 조종사인 84세의 라우스 데이 삭셀(Laus-Day Saxel)의 카렐리야 방문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날의 기자회견을 통해 키지 포고스트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순간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1941년 11월 12일 삭셀은 오네가 호수에 있는 '크고 오래된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핀란드정보국에 따르면 당시 이 교회는 러시아 공격의 표적 중 하나였다. 삭셀과 그의 동료는 두 대의 전투기에 나눠 타고 키지로 향했다. 폭탄 투하를 위해 고도를 낮추었을 때 삭셀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깨끗한 눈을 배경으로 서 있는 키지 포고스트의 장관에 감탄하였다. 대신 그는 폭탄을 오네가 호수에 떨어뜨리고 자신이 조준을 잘못한 것으로 처리했다. 그는 교회 주변에서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당국에 보고했고 그것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고백했다.

예수변모교회의 내부는 뛰어난 장식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102개의 이콘화로 이뤄진 4층의 이코노스타스는 표현력 있게 새겨진 꽃과 휘감긴 포도나무 덩굴의 금박 프레임에 둘러싸여 있다. 대부분의 이콘화는 18세기의 것이며, 이 중 '중보'와 '변형'만 17세기 말에 그려졌다. 천장의 벽화는 성삼위일체 이외에도 천사들에 둘러싸인 족장들로 장식되어 있다.

예수변모교회 옆에 있는 성모중보교회는 10개의 돔을 가진 소박한 외관으로 구별되지만 두 건물은 서로 조화롭게 보완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성모중보교회의 높이는 26미터이고 총 길이는 32미터, 폭은 8미터에 이른다. 성모중보교회는 1694년에 건립되었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1764년에 재건되었으며, 난방시설을 갖추고 있어 '겨울 교회'라고 불린다. 예수변모교회와 마찬가지로 크기와 곡면(曲面)의 모양이 각기 다른 양파형 돔에 맞춰 나무 조각을 깎아 붙였다. 몸체는 주로 소나무로 만들어졌고, 일부분만 사시나무와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종탑은 높이가 30미터, 길이 7.4미터, 폭 7.3미터이다. 사각형의 건물 위에 팔각형의 피라미드형 지붕이 올려진 전통적인 설계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팔각형의 구조물 위에는 9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종이 들어있다. 텐트형 지붕 위에는 십자가가 달린 쟁기 머리가 있다. 사각형의 건물은 두 개의 벽에 의해 현관, 계단, 헛간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 종탑으로는 5층 높이의 계단이 이어진다. 내부 공간은 사각형의 몸통 구조에 있는 4개의 아치형 창문과 북동쪽 벽에 있는 팔각형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키지 포고스트는 예수변모교회 22개, 성모중보교회 10개, 그리고 종탑의 1개 등 총 33개의 돔이 멀리서도 빛난다. 일반적인 정교 교회의 돔이 3개, 5개로 이뤄져 있는데 반해, 키지 포고스트는 월등히 많은 숫자의 돔으로 남다름을 자랑한다. 숫자 33은 예수의 나이를 상징한다.

교회 건축 이외에도 키지섬에는 역사적 건물과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나사로부활교회는 1959년 오네가 호수의 푸도시 주에 있는 무롬 수도원에서 옮겨왔다. 몸체는 소나무, 돔은 사시나무로 지었다. 전설에 의하면 무롬 수도원(1286-1391)의 설립자인 성(聖) 라자리(나사로)에 의해 건립되었다. 14세기에 세워진 나사로부활교회는 러시아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교회는 여러 차례 복원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출입문이 생기고 지붕이 교체되었으며, 건물의 뒤틀림 현상이 제거되고 새로운 돔이 설치되었다. 지금은 맞배지붕이 있는 세 개의 헛간으로 구성된 단순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내부에는 16-18세기의 이콘화로 이뤄진 2층의 이코노스타스가 있다.

키지섬에는 삶의 오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건축들이 남아있다. 카렐리야 지방에 몇 개 남지 않은 풍차 중 하나가 이곳에 있다. 1928년 볼코스트로프 마을에 지어진 이 풍차는 1976년 키지섬으로 옮겨와 복원되었고 오늘날에도 가동되고 있다. 공장 내부는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밀가루 분쇄 장치와 제분한 밀가루 상자가 있고, 2층에는 제분용 큰 쇠통, 맷돌, 끝에 날개가 있는 굴대가 있다. 날개가 8개인 이 풍차는 곡물을 갈아서 밀가루를 만드는 본래의 기능을 지금까지도 수행하고 있다. 키지는 또한 세계에서 유일한 순지트(Shungite) 산지로도 유명하다. 러시아어로 슌기트라고도 불리는 이 물질은 다양한 가치와 치유력이 있는 탄소 함유 광물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키지섬 부근의 슌가 마을에서만 채취되어 마을 이름을 딴 명칭이 부여되었다. 풀러렌의 함량에 따라 검정색과 은색으로 구분되며 건강팔찌와 목걸이, 화장품과 비누로 만들어져 판매된다. 순지트 제품은 카렐리야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념품 중 하나이다.

키지는 또한 러시아 민속 문화의 보고(寶庫)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고대 루시에서 널리 퍼져 있던 고대 영웅서사시들은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19세기에 자오네지예(Zaonezhie)에서 수집되고 채록되었다. 자오네지예 지역의 이야기꾼들이 대대로 전승해온 덕택에 볼가와 미쿨라, 일리야 무로메츠, 새의 날개를 가진 인간 솔로베이 라즈보이닉에 대한 이야기 등이 오늘날까지 기록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왕자이자 대장인 볼가는 들판에서 땅을 경작하는 미쿨라라는 농부를 발견하는데, 큰 쟁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과 무용에 놀라 그를 자신의 부대에 합류시킨다. 평범한 농부가 왕자와 함께 하면서 농부의 일을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이 이야기에는 러시아인의 강인함이 묘사되어 있다. 미쿨라는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민담의 영웅 중 하나이자 러시아 농부의 화신(化身) 그 자체였다.

러시아음악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리꾼 이리나 페도소바(1827-1899)도 키지섬 출신의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다. 키지의 원주민으로 유명한 그녀는 러시아 민속 이야기꾼이자 민요연주자였다, 그녀의 곡소리는 너무도 유명해서 성악가 표도르 샬랴핀을 비롯하여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발레키예프 등의 음악인이 들을 정도였다. 페도소바가 조용히 노래를 읖조리면 듣는 이들이 모두 울음을 터트릴 정도였다고 한다. 문학가 막심 고리키(M. Gorky)는 청년 시절 페도소바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자신의 소설 '클림 삼긴의 생애'(1927) 속에 그녀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했다.

"다 닳아빠진 알록달록한 머릿수건을 둘러매고 짙은 색의 사라사를 입은, 우스꽝스럽지만 선량하게 생긴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눈과 미소 짓는 둥근 얼굴을 한 주름 가득한 마귀할멈이 몸을 흔들며 무대로 나왔다."

키지섬은 문화를 사랑하는 러시아인의 노력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걸쳐 특별한 야외박물관으로 조성되었다. 키지 포고스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전통 목재 건축들을 키지섬으로 옮겨와 보수하고 가꾸는 노력은 일관성 있는 경관을 통한 문화 정체성을 가꾸는 시도라는 점에서 본받을만하다. 도끼 한 자루만으로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멋진 건축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유산을 대하는 러시아인의 진지한 태도와 보존 노력이 오늘날 키지섬을 한 폭의 그림 같은 신화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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