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이 떠난 '벽돌공 시민군' 이정모 형의 삶 복원해야죠"

안관옥 2021. 5. 17. 19: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짬】광주전남 불교환경연대 이해모 사무총장

벽돌공 출신 시민군 이정모의 생애를 회고하는 동생 이해모(52) 사무총장. 안관옥 기자

“시민군으로 참여한 뒤 겪어야 했던 고립과 울분을 추적해 보려 합니다.”

5·18광주민중항쟁 41돌을 앞둔 지난 13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묘지. 너무나 평범해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시민군 이정모(1956~84)의 묘비 앞에 동생 해모(52)씨가 꽃다발을 공손하게 바쳤다. 해모씨는 “형님은 가족을, 시민을 끔찍하게 사랑한 죄밖에 없었던 분”이라며 “‘폭도’라는 낙인을 감당하지 못해 한창 꽃다운 나이에 이승에서 밀려났다”고 안타까워했다.

시민군 이정모는 1980년 5월 이래 극단적 선택을 한 항쟁 참여자 46명 가운데 한명이다. 벽돌공이었던 그는 5·18 당시 불의에 맞서 총을 들었지만 41년 동안 잊힌 존재였다. 그런 그를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위원인 서다솜·이지영씨가 햇볕 아래로 불러냈다. 두 사람은 5·18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10돌 기념전인 <법 앞에서>(6월30일까지 광주 5·18기념문화센터)를 준비하다 재판기록으로만 남아있는 한 시민군의 행적에 주목했다. 법적 처벌을 받은 이후 생활을 추적하기 위해 가족들을 만났다. 80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동생 해모씨의 증언은 시민군 전사의 분열된 내면을 그대로 드러냈다.

국립 5·18민주묘지에 있는 시민군 이정모의 사진.

그는 산간벽지인 전남 화순군 동면 오동리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기와와 벽돌을 찍는 일을 배웠다. 5·18 당시엔 화순읍 벽돌공장에 취직해 월급 8만원을 받던 23살의 청년이었다. 80년 5월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자 그의 가족도 혼란에 빠졌다. 전남대 법대 학생이던 장남 윤모씨의 안위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서둘러 광주로 갔고, 가까스로 장남을 데려왔다.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이를 알지 못했던 그도 형을 찾아 광주로 떠났다.

그는 5월21일 형을 찾아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를 넘었다. 이날 광주시 북구 신안동 전남대 앞에서 몇 시간 동안 형을 애타게 찾던 그는 시내로 들가는 시위대의 차량에 탑승해 전남도청·광주공원·광주지법 등에서 시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광주공원 앞에서 시위대와 하룻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자연스럽게 시민군에 합류했다. 22~23일 계엄군이 퇴각한 전남도청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섰고, 23~27일 전일빌딩 입구에서 경비 업무를 수행했다. 시민을 지키기 위해 카빈총 한 자루와 실탄 15발로 무장한 상태였다. 10년 전 신체검사에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던 그는 전혀 총기를 다룰 줄 몰랐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훗날 자필진술서에 “회수한 총기를 검사하다 안에 실탄이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방아쇠를 당겼다가 오발사고를 내기도 했다”며 “그 외에는 누구를 겨냥해 실탄을 발사한 적이 한차례도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5월 27일 전남도청이 함락된 뒤 전일빌딩에 숨어있다가 안면이 있었던 관리인한테 총기를 맡겨두고 건물을 벗어났다.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오자 광주역 부근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어 28일 오전 다시 형을 찾아 전남대 쪽으로 향하다 옷차림을 수상하게 여긴 계엄군에 붙들렸다.

5·18 때 화순에서 벽돌공 일하다
대학생 형 찾으러 광주로 들어와
시민들 참상 보고 시위 합류해 총들어
상무대 영창서 모진 고문 뒤 옥고
트라우마로 4년뒤 스스로 삶 마침표

“내년 5월에는 형님 생애사 펴낼 것”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5개월 동안 모진 구타와 갖은 고문을 견디어야 했다. 계엄당국은 그를 ‘형님을 찾아 나섰던 평범한 청년’에서 ‘가난 때문에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 ‘전남 출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자’로 만들어 냈다. 계엄당국은 신문조서에 이런 진술을 종용했고, 같은 해 10월 군법회의에서 소요죄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그는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했고, 총을 들고 맞섰던 그는 꼼짝없이 ‘폭도’가 됐다. 도망갈 곳도 숨어들 곳도 찾지 못한 그는 망가진 심신을 수습하기 위해 약과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쌓인 분노와 불안을 풀지 못한 그는 어쩌다 고향을 찾으면 가족을 향해 공격성을 드러냈고,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됐다.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그는 끝내 1984년 12월 광주시 한 여인숙에서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5·18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진 시민군 이정모의 영정.

그는 ‘폭도’로 숨진 지 35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광주지법은 지난 2019년 11월 재심을 통해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맞선 정당행위였다”며 그한테 무죄를 선고했다.

해모씨는 형님의 유지를 받들어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사무총장과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이사를 맡는 등 생명·평화·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해모씨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내년 5월까지 ‘시민군 이정모의 생애사’를 써보기로 했다. 벌써 민중화가 이상호 화백이 중요 장면 20점을 그려주기로 약속했다.

“가족들이 미안한 마음에 영혼결혼과 재심재판을 추진했지만 돌아가신 형님한테 무슨 해원이 되겠나 싶었어요. 고민 끝에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별이었던 형님의 생애를 복원해 민초들의 역사 위에 복권해 드리기로 했어요.”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