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판 '전략적 인내', 그리고 미국의 새 대북정책
[평화재단 (staff@peacefoundation.or.kr)]
'조정된 실용적 접근'
미국 바이든 정부가 대북정책 재검토(review)를 마치고 새 대북정책으로 '조정된 실용적 접근(a calibrated practical approach)'을 내놨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조정'과 '실용적 접근'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월 30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대북정책 재검토의 종료를 알리면서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일괄타결 달성에 초점을 두지 않을 것이며 전략적 인내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와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의 문제점과 한계를 조정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해 10월 바이든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의 핵능력 축소'를 언급했으며, 올해 5월 2일 설리번 안보보좌관은 새 대북정책이 '전부 또는 전무(all for all, or nothing for nothing)' 방식이 아닌 조정된 실용적 접근법이라고 언급했다. 이를 감안할 경우 실용적 접근의 내용은 빅딜이 아닌 스몰딜, 일괄타결이 아닌 단계적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난 4월 28일 바이든 대통령은 첫 의회연설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해 외교와 단호한 억지(stern deterrence)"로 대처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북한은 이미 핵능력 국가(nuclear capable country)로 전환했으며, 복합적이고 방대한 핵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북한과 같은 핵능력 국가의 비핵화 사례는 전무하다.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이 스몰딜과 단계적인 방식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비핵화의 특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볼 수 있다.
바이든 정부가 동맹과 연대를 강조하며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한국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또한 외교적 해법을 통해 전략적 인내 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 같은 방식은 북한의 협상전략과 상당부분 친화력이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정책에 대한 우려도 상존한다. 바이든 정부는 출범 이후 100일 동안이나 대북정책 재검토 과정을 거쳤으며, 향후 북한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러시아, 이란 등의 문제에 비해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의 시급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북한이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명분과 실리를 보장해주어야 하지만 아직 이 부분이 불명확하다. 바이든 정부는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북한 핵문제에 대한 일본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바이든 정부가 기대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역시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재검토를 마친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정책은 북한 핵과 한반도문제 해결에 있어 기회와 위험요인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북한판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정면돌파전을 선포하고 미국에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올해 1월 북한은 노동당 제8차 대회를 개최하고 자력갱생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을 채택했다. 자력갱생전략은 대북제재 상황에 굴하지 않고 내부의 역량을 통해 국가발전을 꾀하겠다는 의미로 미국과의 장기전에 대응하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4월 29일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제10차 대회에 보낸 서한에서 "앞으로 15년 안팎에 전체 인민이 행복을 누리는 융성 번영하는 사회주의 강국을 일떠세우자고 한다"고 밝혔다.
향후 세 차례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을 통해 사회주의 강국을 완성시키겠다는 것으로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김 위원장은 앞서 4월 8일에도 노동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 폐회사에서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북한 인민들이 기억하기조차 싫어하는 비극적 경험을 다시 꺼냈다는 것은 미국과의 대결국면에서 초래될 난관에 굴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결이 다르게 2017년 9월 6차 핵실험과 11월 화성15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이후 북한이 자체적인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준수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6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발사한 각종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은 모두 단거리였다.
순항미사일 발사는 유엔결의 위반이 아니며, 단거리 발사체에 대해 유엔이 결의하거나 대북제재를 부과한 적은 없다. 북한이 2019년 10월 발사한 북극성 3형 SLBM은 중거리 탄도미사일이었지만 사거리를 450km로 제한했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의 단거리 발사체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북한은 2020년 6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으며 거친 대남비난담화를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다. 특히 김여정 부부장은 올해 3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정리와 금강산국제관광국 등 관련기구의 폐지를 경고한바 있으며, 5월에도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상응한 행동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미국에 대한 담화는 수위를 조절한 흔적이 역력하다. 북한은 올해 1월 바이든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으며, 바이든 정부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3월 김여정 부부장의 대남비난 말미에 '잠 설칠 일 만들지 말라'였다.
지난 5월 2일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과 대변인의 대미담화도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니었다. 바이든 정부가 새 대북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북한과 접촉을 시도 중이라고 알려져 그 귀추가 주목된다.
여러 정황상 북한판 전략적 인내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전략적 도발을 자제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북‧미 비핵화협상의 새 돌파구 마련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대북제재와 코로나 19사태의 여파로 내부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현재의 기조를 계속 유지할지는 미지수다. 특히 이란 핵개발에 대해 이스라엘이 반발하고 이란과 연계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무력충돌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핵문제의 우선순위가 보다 하향 조정될 경우 북한이 전략적 도발로 선회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코리아 이니셔티브(Korea Initiative)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과 북한판 전략적 인내는 한국 외교에 기회와 위험이 병존하는 공간이다. 위험요인을 최소화하고 기회요인을 극대화함으로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할 시점이다. 당면과제는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과 행동 대 행동 방식에 입각한 비핵화 로드맵을 도출하고 비핵화 행동과 상응조치의 초기합의를 통해 비핵화의 불가역적인 입구를 형성하는 것이다.
영변 핵시설을 포함해 7차례 방북경험과 아울러 북한 핵문제에 정통한 스탠포드대학의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는 공동논문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에 10년이 소요될 것이며, 정치적 요인이 개입될 경우 기간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핵이 없을 경우 북한은 한‧미의 압도적인 재래식 전력과의 격차를 해소할 방법이 전무하며, 핵무기는 북한 인민들에게 국가적 자존심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이 장기성과 복합성을 띠는 이유이다.
따라서 비핵화에 대해 포괄적으로 합의하고 단계적으로 이행해나가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비핵화 행동과 상응조치를 교환하는 행동 대 행동방식은 북한 비핵화를 촉진하는 현실적인 수단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초기합의의 시동을 거는 일이다. 30여 년간 지속된 북한 비핵화협상이 실질적 성과에 한계를 보인 것은 행동을 수반하는 초기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8년과 2019년 진행된 남‧북‧미 한반도 정상외교의 동력은 코리아 이니셔티브였다. 한국은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 의제를 도출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견인했다. 9월 평양 남북 공동선언에 명기된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의사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의제가 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북‧미가 각각 새 대북정책을 선보이고 전략적 인내를 지속하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셈법이 달라 돌파구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역할 공간은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미 간 회동의 주선과 협상의제의 도출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안까지 마련해야 진정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촉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다시 코리아 이니셔티브를 구현해 싱가포르와 하노이로 돌아가야 한다.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싱가포르 북‧미합의를 토대로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의 비핵화 로드맵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 합의를 준수한다는 것은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와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 확인을 의미한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행동을 수반하는 북‧미 간 실질적 합의를 위한 첫 시도였다. 북한이 이미 영변 핵시설 영구폐기 의사를 밝힌 바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해커 박사는 지난 4월 30일 영변 핵시설이 노후화되었다는 주장을 일축하며 북한 핵프로그램의 핵심이라고 했다. 영변 핵시설이 폐기될 경우 북한의 3대 핵물질 생산시설인 재처리시설과 삼중수소 생산시설의 완전제거와 아울러 고농축우라늄 생산용 원심분리기 시설의 상당부분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핵능력 고도화와 확산을 막기 위한 동결(freezing)까지 수반될 경우 북한 핵능력의 상당부분이 불가역적으로 축소되며, 이는 바이든 정부가 원하는 바다.
미국은 종전선언과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행동을 구체화하고 대북제재 일부해제를 상응조치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이미 합의된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사업 재개, 철도‧도로 연결, 그리고 5.24조치 해제 등의 상응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상응조치를 통해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남북관계의 동력을 확보하는 효과를 도모할 수 있다.
오는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은 북‧미 비핵화협상 견인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이다. 특히 북‧미 간 초기합의를 도출해 비핵화의 불가역적인 입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미국의 새 대북정책을 전달받은 만큼 다방면으로 북한의 의사를 확인해 한‧미 정상회담에 반영해야 한다. 북한도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주시할 것이다. 모처럼 만에 열린 기회의 창을 적극 활용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다시 궤도에 올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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