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사람, 이현우 기자를 기억하며

구자창 국민일보 기자 2021. 5. 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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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현우 국민일보 기자 추도사] 구자창 국민일보 기자

이현우 국민일보 기자가 지난 12일 별세했다. 향년 33세. 고인의 동기인 구자창 국민일보 기자의 추도사를 싣는다.

故이현우 국민일보 기자

이현우 기자를 처음 만난 날은 2016년 12월26일이었습니다. 최종 합격한 동기 10명의 예비소집일이었습니다. 이날 처음 본 이현우 기자는 다가서기 쉽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뒤늦게 털어놓는 것이지만 무표정할 때면 날카로워지는 인상에 남다른 체격까지, 기가 죽어 선뜻 말을 걸기가 꺼려졌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가 은근슬쩍 “형”이라고 불러오면 저도 모르게 속내를 다 털어놓고는 했습니다. 왠지 그에게는 다 말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지인들은 하나 같이 그가 “친절했다”고 말했습니다. “주변 공기를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 “친절하고 편견 없이 대해준 친구”라는 회상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를 떠나보내기 전 작별 인사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채팅방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친절을 베푼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얘기일 것입니다.

이현우 기자는 2017년 1월부터 2021년 4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기자로 일했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를 함께 겪었습니다. 촛불과 태극기로 갈린 광화문과 시청광장을 그와 함께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는 종횡무진 취재를 하다가 어르신들께 얻어맞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했습니다.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근성 있는 기자였습니다. 선배들이 취재를 염려할 때면 “한번 해보죠”라며 대뜸 안심시키는 그런 기자였습니다.

이현우 기자는 종교부, 체육부, 정치부, 산업부를 거쳤습니다. 가장 많은 애정을 갖고 일한 곳은 체육부였을 겁니다. 1년 10개월을 일했습니다. 그는 좋은 체육기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판화를 찍어내듯 기사 쓰는 속도가 남달랐습니다. 대강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기사를 슬쩍 훑어봤는데 품질이 남달랐습니다. 탐나는 솜씨였습니다. 늘 생각만 하고 실제로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합니다. “현우야, 너는 참 좋은 체육기자였다.”

그가 가장 많이 썼고 잘 썼던 기사는 야구 기사일 겁니다. 그는 야구를 사랑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미국의 메이저리그 전 구장을 여행했고 ‘어리버리스’라는 이름의 야구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직장인이 돼서도 사회인 야구를 하면서 야구에 애정을 쏟았습니다. 한 번은 그가 ‘사이드 암’으로 멋진 직구를 던지는 영상을 봤는데,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끝나지 않은 야구경기를 취재하러 가는 그의 표정은 소풍 전날의 아이 같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현우 기자는 늘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체육부 생활을 마치며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 기억납니다. KIA 타이거즈의 투수 전상현이 피나는 노력 끝에 평균 구속을 140km대로 끌어올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취재증을 2018년 5월 손에 쥐었다. 안타깝게도 기억에 남는 기사들이 별로 없다. 오르지 않는 구속에 가슴을 치면서 방법을 찾던 전상현과 달리 나는 게으르기까지 했다”고 반성했습니다. 그가 공들여 쓴 기사들에 비해 박한 자기반성이었습니다.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그를 존경하고, 정말 수고가 많았다는 격려를 보냅니다.

이현우 기자는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은 수술 도중 예상 못했던 사고가 났습니다. 회복을 염원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모바일 청첩장에는 “늘 봄날처럼 밝고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혔습니다. 애석하고 원통할 뿐입니다. 청첩장의 사진 속 밝은 표정을 보면서 어떤 죽음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친절했던 그였기에, 떠나보내는 마음이 더욱 안타깝고 시립니다. 앞으로 남은 날이 더욱 많았기에, 빛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 앞에 말문이 막힙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의 빈 자리를 채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추모사를 수십번 고쳐 쓰다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을 겨우 쳐다봅니다. 그가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내 몫까지 분투해달라”고 말을 던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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