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뛰다 멘붕 온 '영국 쿠팡맨'.. 아들이 뼈 때리며 던진 말 [왓칭]

한경진 기자 2021. 5. 1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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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안해요 리키'
'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 감독 작품
따뜻한 우파가 봐야 할 좌파 영화
영화 '미안해요, 리키'

코로나 창궐 이후, 기자는 유명 음식 배달 앱의 ‘마스터’이자 새벽 배송 쇼핑몰의 ‘프렌즈’ 회원으로 디지털 신분이 한 단계씩 상승했다. 지금껏 얼굴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마주할 가능성이 적은 배송원들이 아침 저녁으로 문 앞에 떡볶이와 치킨, 닭발과 생수 등을 가지런히 놓고 갔다.

늘어진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를 입고 재택 근무를 하던 어느 날,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처럼 집에 갇혀 군만두를 씹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대체 불가능한 필수 노동자는 문 밖의 배송원인가, 집 안의 나인가.’ 그날따라 업무용 메신저는 조용했고, 창 밖으로 오토바이 배기음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영화 '올드보이'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방식과 인간 관계가 송두리째 뒤바뀐 세상에서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는 그간 ‘저숙련 노동자’로 분류됐던 배달 노동자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줬다.

4차 산업 혁명 시대, 디지털 노동 시장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건 모름지기 ‘개발자’들이라지만, 팬데믹 세계는 환경 미화원, 전기·수도공, 트럭 운전사 또한 우리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필수 노동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아직까지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신기술은 없다.

◇Skip or Stream?…우파가 봐야 할 좌파 영화

Stream it!(틀어봐!)

왓챠에서 감상할 수 있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2019)’는 영국 택배 기사 가족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린 영화다. 칸 영화제 감독상을 두 번이나 받은 ‘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85) 감독이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 내놓았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사회 문제를 꼬집는다고, 선전·선동이나 하고 음모론이나 피우는 작품으로 예단해선 안 된다. 영화는 영국 하층민의 삶을 담담하게 조명했다. 구구절절한 ‘신파극’이 아니며, ‘화이트칼라 악당’ 같은 클리셰(뻔한 표현)도 등장하지 않는다. 감상하는 동안, 그저 이 가정의 행복이 무너져 내릴까 불안하기만 할 뿐이다.

Skip it?(건너뛴다고?)

‘좌파 감독의 좌파 영화’이지만, 포용적 성장과 따뜻한 자본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보수 우파에게 강력 추천한다. 저평가된 노동자에게 공정한 대우를 하는 것, 혁신의 속도에 맞춰 합당한 보상을 제시하는 건 건강한 시장 경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주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택배 뛰다 멘붕 온 ‘영국 쿠팡맨’

왕년에 좀 놀았던 걸까. 리키의 양쪽 팔뚝에는 젊은 시절 새긴 것으로 보이는 문신들이 푸르스름하게 바래있다. 리키는 성실하다. 온갖 일을 다 해봤다. 콘크리트 치기, 도로 포장, 배관 작업, 목공, 바닥·기반 공사처럼 주로 건설 현장 일이었고, 심지어 무덤까지 파봤다.

그런 그가 ‘자영업 택배기사’ 전선에 뛰어든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공사판에는 늘 짜증나게 하는 십장(什長)이 있었고, 게을러 터진 동료들은 답답했으며, 무더위와 강추위가 육체를 힘들게 했다. 리키는 남들보다 땀 흘린 만큼, 더 벌고 싶었다. 방문 요양사로 남의 피고름과 배변을 닦아내며 사는 아내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면에선 빨리 뛸수록 더 많은 수수료를 가져갈 수 있는 택배기사가 딱이었다. ‘2년 안에 주택담보대출 계약금 모으기’라는 야심찬 목표 아래, 택배 업체 문을 두드린 이유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집구석에 속 썩이는 인물이 있는 건 이 세상 ‘국룰’(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을 뜻하는 신조어). 리키 집에선 아들 세브가 사고뭉치다. 학교는 안 가고, 길거리 벽화 그리는 일에만 관심 있다. 리키는 아들이 사고칠 때마다 애원한다. “네 인생에 선택권을 줘라. (아빠처럼) 가능성을 차버리지 마라. 거지 같은 일 전전하면서 14시간 일하고, 남 뒤치다꺼리하면 결국 ‘종놈’이 되는 거야!”

영화 '미안해요, 리키'

아들의 대답은 뼈를 때린다. “(이웃 형처럼) 대학 갔다가 5만7000파운드 빚지고, 콜센터에서 일하면서, 현실을 잊으려고 주말마다 만취하라고? 아빠 삶은 주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거잖아.” 이런 촌철살인을 요즘 말로 ‘ㅂㅂㅂㄱ(반박불가)’라고 하던가.

리키와 대립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대사가 무섭도록 현실적이다. 핍진한 삶에서 터득한 통찰이 베일 듯 날카롭다. 리키를 쪼아대는 택배업체 점장은 “수많은 집 다니면서 얼굴 본 고객 중에 진심으로 자네 안부를 물은 적 있느냐”고 비꼰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물건 훔치다 걸린 세브를 조사한 경찰관은 리키 부자(父子)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살면 네 삶에 불행과 고통만 있을 거야. 네 아버지는 널 위해 일을 팽개치고 달려와서 굴욕적인 상황을 감내하고 계셔. 이런 가족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넌 있잖아.”

조국 전 법무장관 같은 아버지가 없는 세브가 정신을 차려본들 ‘종놈’ 아닌 ‘주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누구보다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 가는 리키의 삶은 하루 하루 꾸준하게 엉망진창이 돼 간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페트병에 오줌을 누고, 졸음 운전을 하는 리키. 그의 인생은 ‘택배 스캐너’가 주인공인 슬픈 우화(寓話)다.

◇디지털 배송 혁명의 그늘

기막힌 현실이 어디 영국뿐일까. 얼마 전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택배 기사들과 주민 간에 극심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화제였다. 주민 안전·보도 훼손을 이유로 아파트 측이 택배 차량 진입을 막으면서, 단지 앞에 택배 상자가 산(山)처럼 쌓였다.

지난달 14일 택배 기사들이 서울 고덕동의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 배송품을 쌓고 있다. /장련성 기자

일부 입주민은 기사에게 문자 폭탄을 날리며 ‘문 앞까지 배송하라’고 항의했다. 택배 기사들이 차량 출입 금지 조치의 어려움을 알리는 전단지를 붙이자, 아파트 측은 ‘주거 침입’ 혐의로 이들을 경찰에 고발했다. 이 아파트에는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신고까지 접수돼 경찰과 소방 인력이 출동하기도 했다.

[기사보기] 택배기사들 “단지 앞까지만 배달”… 박스 수백개 쌓았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 겨울 조선일보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 웨비나에서 이런 화두를 던졌다. “코로나 유행으로 우리는 배달원이나 물류 창고 직원, 트럭 운전사에게 얼마나 크게 의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운이 좋은 사람은 안전하게 집에서 근무하겠지만,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을 안고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대한 보상과 사회적 인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한다.”

[기사보기] 마이클 샌델 “코로나가 일깨운 저소득 육체 노동자의 가치… 엘리트, 더 겸손해져야”

영화 '미안해요, 리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어요(Sorry We Missed You)’다. 이 말은 원래 고객이 집에 없을 때, 택배 기사들이 대문에 붙여두는 메모 문구다. 감독은 메시지를 거꾸로 틀어, 세상 모든 택배 노동자에게 건네는 말로 전용(轉用)했다. 세상의 표정이 자꾸만 험악해지더라도, 이 말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마워요, 리키’.

영화 '미안해요, 리키'

개요 드라마 l 영국 l 2019 l 1시간41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특징 우파가 봐야 할 좌파 영화

⭐평점 IMDb 7.6/10 🍅로튼토마토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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