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호르몬 '사칭' 환경호르몬의 공습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환경호르몬은 '내분비계 교란물질(이하 EDC)'에 속한다. 내분비계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세포 혹은 조직으로 이루어진 기관계(器官系)를 일컫는다. 호르몬이 혈액을 통해 몸 전체로 제대로 수송돼야 우리 몸의 성장·대사·생식기능이 원활해지는데, 체외 화학물질인 환경호르몬이 몸 안에 들어오면 내분비계가 교란 상태에 빠질 수 있다. EDC는 호르몬과 공통점이 많고 유사한 구조여서 호르몬(특히 여성호르몬) 수용체와 쉽게 결합하거나 호르몬이 붙는 자리를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전은 이렇다. 음식물이나 피부 등을 통해 체내에 들어온 EDC는 여성호르몬(E2)인 척하면서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닌다. 이때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표적기관(특히 생식기관)들이 EDC를 진짜 호르몬인 줄 알고 받아들여 호르몬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환경호르몬과 자꾸 접촉하면 단순히 호르몬 분비 불균형에 그치지 않고 면역기능 저하부터 생식기능 이상 등 많은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자 수 감소, 난임, 습관성 유산 유발
먼저 생식내분비계가 직격탄을 맞는다. 우리 몸의 호르몬 체제는 뇌-난소-자궁, 뇌-고환으로 연결된다. 난소에서 자궁으로 '호르몬'이라는 전파를 보내면 자궁의 수신기가 받아야 한다. 그런데 EDC가 끼어들면 교란을 일으켜 자궁이 난소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할 일(단백질 합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EDC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생식기능 저하를 초래한다. 남성의 체내에서는 정액의 질을 떨어뜨리고, 정자 수를 현저히 감소시킨다. 또한 정자 두부의 DNA가 손상될 수 있다. 메틸기(후성유전물질)라고 하는 화학물질이 정자 DNA에 붙어 유전자 발현 기능을 억제할 뿐 아니라 정자 핵 속 히스톤 단백질의 변형을 야기한다. 이렇게 되면 정자 DNA 유전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외부 주위 환경(환경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DNA 염기서열에 변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메틸화 히스톤 단백질 변형'이라고 한다.
여성의 몸 안에서는 난임이나 습관성 유산을 초래하고 자궁내막증이나 다낭성난소증후군을 유발할 수 있다. 실제로 환경호르몬의 일종인 비스페놀A에 장기간 노출되면 자궁에서 '프로게스테론 수용체(PGR)'가 정상적으로 발현하지 못하거나 자궁내막세포에 이상이 생겨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할 수 없게 된다.
발생생물학회장을 지낸 전용필 성신여대 교수가 최근 '자궁내막 수용석 분석(ERA)' 물질에 따른 자궁의 손상 정도를 심층 분석한 연구 결과에 주목하자. 프탈레이트(플라스틱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 첨가제)를 생쥐에 투여하고 자궁의 이상 여부를 관찰했더니 가지런한 V자 모양의 자궁이 찌그러진 V자 모양으로 바뀌고 수태율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비스페놀A는 자궁내막 세포에, 프탈레이트는 자궁 근육층에 더 심각한 이상을 초래했다. 더구나 EDC는 우리가 쓰는 플라스틱 제품 대부분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EDC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방법은 뭘까. 다행히 최근에는 환경호르몬에 안전한 용기가 많아지고 있다. 플라스틱 용기를 선택할 때 '식품용'인지 확인하고 사용한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음식 배달 용기에 있다. 배달 용기로 쓰이는 플라스틱에는 프탈레이트라는 화학첨가제가 사용된다. 특히 랩으로 포장한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려선 절대 안 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PE랩은 EDC로부터 안전하지만, 식당과 음식 배달업체에서 사용하는 포장용 랩(PVC)은 전자레인지 등 고온에 노출되면 가소제가 녹아 나올 수 있다. 식당이나 음식 배달업체는 고온 식품이나 기름기가 많은 음식에 랩을 사용할 때 되도록 닿지 않게 포장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턱없이 낮은 저가(低價) 식료품이나 음식물을 감싼 포장재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탈레이트는 방향제나 어린이 장난감 등에 사용된다. 비스페놀A는 우리가 마시는 음료와 통조림 내부 코팅제에 쓰인다. 코팅된 조리 용기, 종이 등 즉석식품의 포장재에는 환경호르몬의 하나인 과불화합물(PFCS)이 들어 있다. 벽지, 장판, 화장품, 종이 영수증도 대부분 EDC에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경호르몬과 거리두기가 관건
이처럼 도처에 EDC가 널려 있는데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EDC가 몸속에 들어와도 당장 생명을 위협하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몸에 들어온 EDC는 지방이나 조직 등에 축적됐다가 시간이 흐른 후 질병으로 나타난다.비스페놀A는 당뇨병, 정자 수 감소, 정액의 질 저하, 다낭성난소증후군을 유발한다. 프탈레이트는 미숙아가 태어나게 하고 남자아이의 항문과 음낭 간의 거리가 달라지게 만든다. 소아비만이나 혈액 내 포도당 농도의 이상 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EDC는 생식기능에 치명적이다. 결혼이나 출산 계획이 없더라도 생식기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피하는 것이 좋다. 일례로 신용카드를 사용한 후 주고받는 종이 영수증도 비스페놀A 함량이 매우 높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감열지로 만들어진 영수증 한 장에는 캔 음료나 젖병보다 100배 많은 비스페놀A가 들어 있다. 요즘처럼 종이영수증보다 전자영수증이나 문자 인증을 더 활발히 사용하는 것은 지구 환경은 물론이고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추세다.
산부인과(난임) 의사로서 우려되는 점이 있다. 비스페놀A는 남성보다 여성의 몸 안에서 훨씬 더 빨리 흡수되고, 먹는 것보다 피부 접촉으로 더 쉽게 흡수된다는 것이다. 스위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열지를 5초만 만져도 피부를 통해 0.2~0.6ug(마이크로그램)의 비스페놀A가 흡수됐다. 또 먹었을 때보다 만졌을 때 몸에 더 오래 머물렀다. 비스페놀A가 묻어 있는 물건을 5분간 만지면 이후 48시간까지 소변을 통해 그 농도가 확인됐다.
의학·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간의 기대수명은 여성 90세, 남성 80세를 넘어섰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시절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오래'만이 아닌 '건강하게'에 방점을 둬야 한다.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다면 환경호르몬과 생식력 간의 상관관계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EDC와 현대문명의 공존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적당한 '거리두기'가 최선의 해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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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호르몬과
거리두기 10계명
02 텀블러에 커피 담아 마시기
03 전자레인지용 플라스틱 용기인지 확인하기
04 생수병을 햇볕 강한 베란다에 오래도록 쌓아두지 않기.
05 배달 음식을 포장한 PVC 재질 랩을 전자레인지에서 사용하지 않기
06 저가 식료품 포장재와 외국제 장난감 성분 꼼꼼히 살피기
07 무쇠 혹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었거나 세라믹으로 코팅한 프라이팬 사용하기
08 '프탈레이트 프리(Phthalate-Free)' '비스페놀A 프리(BFA-free)' '파라벤 프리(Paraben-Free)' '트리클로산 프리(Triclosan-Free)' 표시가 있는 제품 쓰기
09 장난감 고를 때 국가통합인증(KC) 마크 확인하기
10 고무대야, 장갑, 김장용 매트 구매 시 '식품용(PS, PE, PP, PET)' 여부 확인하기
조 정 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난임전문의 조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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