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두줄기 붉은 수직기둥, 새신문 향한 열망 쌓아올린 듯

노형석 2021. 5. 1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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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동지와 함께 찾은 한겨레가 자란 공간들 (상)
창간준비 사무국 차렸던 '안국빌딩'
50년 넘게 북촌 지킨 김중업 작품
맞은편엔 김수근의 한국일보 빌딩
"모던 감각 건물 덕 인재들 줄 섰죠"
성장 격동기 함께한 양평동 사옥
방북취재 관련자 연행·압수수색 현장
2층 공장창고,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역사적인 현장들, 작은 기념물이라도.."
김중업의 수작으로 꼽히는 안국빌딩의 가장 큰 건축적 특징으로 꼽히는 정면부의 수직 기둥. 기둥의 수직면 전체를 붉은빛 특제 타일을 구워 장식한 것은 국내 다른 건축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한겨레신문 창간사무국이 있던 안국빌딩 정면의 수직 기둥 벽체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서형수 전 대표이사(왼쪽)와 김형배 전 논설위원.

<한겨레신문>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서울 근현대 도시 공간의 역사와 같이 흘러왔다. 34년 전인 1987년 6·29선언 뒤 해직기자들의 서울 강남 사우나탕 대화에서 새 신문을 만들자는 의기투합이 이뤄졌다. 그해 9월1일 건축 거장 김중업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서울 북촌 안국빌딩에 창간사무국을 결성하고, 1960~70년대 서울 명동의 랜드마크였던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회관에서 그 다음달 30일 창간발기대회를 열었다. 1988년 5월15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2가 저지대 낡은 공단에 자리한 첫 사옥에서 창간호를 찍고, 압수수색 등 공안당국의 탄압에도 터전을 닦는다. 1991년 12월 소장 건축가 조건영이 서민 동네인 공덕동의 언덕 위에, 튼실한 뼈대를 성채 같은 건물 바깥에 드러낸 진짜 사옥을 낙성했다. 한겨레의 사람들은 그렇게 서울의 중심부와 주변부 공간에 30년 역사를 써내려갔다. 창간준비사무국 시절부터 발 벗고 뛰면서 한겨레의 탄생과 성장을 이끈 주역인 김형배(68) 전 논설위원, 서형수(64) 전 대표이사와 지난 11일 한겨레가 거쳐간 도시 공간들을 답사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사무국이 입주해 운영할 당시 안국빌딩 모습. 당시 막 지은 제호 ‘한겨레신문’을 인쇄한 펼침막을 내걸었다. 한겨레 안국동 시대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 김중업의 건축물에서 한겨레가 싹텄다

여기가 정말 서울 도심일까. 작은 비상문을 열자마자 이런 의문이 들게 하는 진경이 펼쳐졌다. 나선형 철제 통로 바깥으로 푸르른 빛에 푹 젖은 듯한 느낌의 대지들. 녹음에 물든 송현동 공터였다. 수십년간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단지였던 땅 저편으로 멀리 경복궁 전각과 인왕산이 아련한 배경처럼 드러났다. 탄성을 발하며 내려다본 서형수 전 한겨레 대표가 말했다. “직원들이 일 멈추고 나와 바깥을 보며 잡담을 나누던 곳으로 기억합니다. 한겨레 탄생을 준비한 사람들이….”

11일 오전 찾은 곳은 송현동 땅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 잡아 한겨레가 싹튼 모판이 된 서울 북촌 안국빌딩이었다. 한눈에도 두 줄의 육중한 붉은 수직 기둥이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한 이 15층짜리 건축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 거장 김중업(1922~1988)의 설계로 1970년 완공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6·7층에 1987년 9월부터 88년 4월까지 한겨레신문의 창간사무국이 차려졌고, 창간 뒤에도 광고·판매국이 1년간 입주했었다. 두 창간 주역은 수직 기둥을 덮은 붉은색 테라코타 타일을 보면서 30여년 만에 처음 건물을 살펴본다며 감회에 젖었다. 서형수 전 대표는 “1987년 10월1일부터 12월14일까지는 조직이 없는 창간사무국이고 12월15일 주식회사 창립총회 이후로 실제적인 본사가 됐다”고 회고했다.

공사 중이어서 임시로 틔운 출입구를 통해 사무국이 들어섰던 6층에 올라갔다. ‘코어’로 불리는 수직 기둥 뒤쪽 두 대의 엘리베이터와 이 시설을 감싸듯 돌아가는 비상 통로가 보였다. 현재는 네이버 문화재단과 기업연구소, 법률사무소 등으로 쓰이는 내부는 강인한 외부 이미지와 달랐다. 두 사람은 양해를 구해 사무공간을 둘러보면서 “천장이 낮고 유리창을 사방에 틔워 공간이 소박하고 아담하게 느껴졌던 게 기억난다. 한겨레가 쓰던 시절엔 전체 공간을 트고 회의장, 교육장, 토론장 등으로 썼으나 지금은 가벽을 친 것이 달라졌다”고 했다.

1988~89년 한겨레신문 창간사무국이 있었던 안국빌딩 앞에서 과거 입주 시절을 회고하는 서형수 전 대표이사와 김형배 전 논설위원.

이 건물은 지금까지 무려 50년 넘게 서울 안국동, 인사동, 사간동 등 북촌 일대의 우뚝 솟은 랜드마크 구실을 하고 있다. 숙명의 맞수였던 건축가 김수근이 앞서 1969년 설계해 지은 서쪽 인근의 중학동 옛 한국일보 빌딩(2007년 철거)과 마주보는 자리에 있어 양 김씨의 건축물 대결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창간준비사무국 시절 뒤켠의 풍문여고는 이전하고 현재는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됐다. 두 사람은 30년 감회가 깊은 듯했다. 서 전 대표와 김 전 위원은 “당시 신문을 내느냐 마느냐가 절박했기 때문에 건물 자체나 주변 풍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지만, 지금 보니 건물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박물관 개장을 앞두고 있는 뒤쪽 옛 풍문여고 건물 터에는 원래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가례를 올리기 위해 세운 안동별궁이 있었다. 이 길지 앞에 풍채 좋게 들어앉은 안국빌딩은 정치권에서도 명당으로 소문났다. 맞은편 인사동 들머리가 1960년대 옛 신민당 당사 터였다.

“첫 출근할 때 일하는 분들이 후줄근한 옷차림에 눈매가 날카로운 분들이어서 모던한 건물과는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정태기 당시 사무국장이 현대적인 느낌의 사무공간을 골라 외부인들에게 신문 작업이 잘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 했던 거죠.”(서형수)

“이 건물에서 사무공간을 열지 않았으면, 그렇게 많은 기자 지망생들이 원서를 내지 않았을 거라고 봐요. 단단하고 현대적인 건물 자체를 보고 아, 신문사가 본격적으로 되는구나 생각했을 거예요. 건물 덕을 본 것이죠.”(김형배)

발길은 인근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창간 직전 공채 기자 지원서 배부·접수장으로 지망생의 대열이 종각까지 800m 이상 늘어섰다는 전설의 장소인 견지동 조계사 옆 작은 벽돌 건물과 1987년 대선 이틀 전인 12월14일 한겨레신문사의 창립총회를 열었던 인사동 옛 영빈가든 자리의 명소 쌈지길 상가였다.

1988~90년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원래 창고와 공장으로 썼던 2층 사옥 건물 뒤쪽에 환기창과 맞배지붕을 인 전형적인 공장 건물들이 세로축으로 줄줄이 보인다. 사옥 터에는 현재 오피스텔 1동이, 뒤쪽 공장 건물들 자리엔 주상복합 단지가 잇달아 들어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양평동 한겨레 사옥 터의 지금 모습. 왼쪽에 있는 단독 고층건물이 사옥 터의 오피스텔(월드메르디앙 아파텔)이고 뒤쪽에 잇닿아 있는 주거단지가 사옥 뒤편 공장 자리다.

■ 격동의 현장은 길냥이 안식처가 됐다

한겨레신문 창간 사옥의 주소는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2가 1-2번지. 선유서로와 영등포로6길 사이에 있다. 문래역에서 내려 도보로 15분, 양평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다. 2층의 10칸짜리 공장 창고 건물로, 2층 전체와 1층 일부에 윤전기 등을 들여 사옥으로 썼다. 원래 공장 시설만 들이고 편집국 등은 마포 공덕동 로터리 쪽 빌딩을 임대해 쓰기로 가계약까지 했으나 당국의 해코지를 우려한 건물주가 거절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공장에 전체 살림을 풀어 놓게 됐다는 게 서 전 대표의 회고다. 그렇게 힘겹게 시작한 양평동 사옥 시절은 방북 취재와 관련한 공안당국의 관계자 연행과 압수수색 등의 탄압과 이에 맞선 한겨레 모금 열풍 등으로 회사의 뼈대와 기반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격동의 성장기였다.

안국동을 돌아보고 찾아간 과거 사옥은 2003년 이미 철거되고, 2005년 이래로 월드메르디앙이란 이름의 15층짜리 주거형 오피스텔(아파텔) 1동이 들어서 있다. 한겨레 창간 사옥을 찍은 초창기 사진에 함께 등장하는 공장단지 역시 2002년 철거된 뒤 고층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서서 사옥 자리의 오피스텔과 이어진 고층단지의 풍경을 내보이고 있었다. 과거엔 쇳가루 날렸는데 지금은 시크한 주거촌으로 바뀐 분위기다. 한편 일부나마 사옥 터 옆에 정밀기계나 밀링 공장 등의 1970~80년대 공장들, 심지어 일제강점기의 톱니바퀴 모양 지붕을 인 소공장들도 남아 있어 묘한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은 월드메르디앙과 복합단지 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오른 화제는 범람 침수에 대한 기억이었다. 안양천이 범람하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던 터라 물을 차단하기 위한 모래주머니를 늘 준비하고 1층 윤전기 공간 옆에다 쌓아 놓았다고 서 전 대표는 기억했다.

1988년 5월14일 한겨레신문 창간호 초판을 찍은 뒤 양평동 사옥에서 송건호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회의를 여는 편집국 기자들의 모습. 송 대표이사 뒤로 리영희, 백낙청, 이돈명 등 창간 작업에 참여한 진보진영 인사들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1월 한겨레신문 창간을 앞두고 공채 원서를 배부하고 접수했던 서울 견지동 조계사 옆 작은 벽돌 건물과 그 앞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서형수 전 대표이사와 김형배 전 논설위원. 당시 입사 지망생들이 넘쳐나 원서를 내기 위해 종각 근처까지 수백미터에 이르는 긴 대기 행렬이 이어졌다고 두 사람은 회고했다.

양평동 일대가 일제강점기엔 시흥군 영등포읍의 일부분이었다. 1910년대 영등포 일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경제적 기반이 상당히 있었고 1936년엔 경성부에 편입됐다. 그 뒤엔 경성의 서쪽 끝에 자리한 신도시 공장지대였다. 한국전쟁 뒤에 파괴되고 복구하며 피난민 주거지역과 혼재되면서 영세 공장업체들이 몰려들었다. 1988년 입주 당시에도 아파트와 공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지금도 이런 공간 성격은 유지되고 있다.

사옥 터 위의 건물은 1층을 틔운 필로티 구조의 건물로 터의 윤곽은 유지하면서 높이를 훌쩍 키운 전형적인 주거형 오피스텔이었고, 뒤쪽 신동아 단지와 2m도 안 되는 간격으로 붙어 있었다. 안기부, 백골단 요원들이 드나들던 옛 사옥 앞마당은 시민공원 쉼터로 바뀌었고, 소나무 단풍나무 숲속에 길냥이 ‘나비’가 초등학생과 놀고 있어 무상한 세월을 실감하게 했다. 안타깝게도 과거 한겨레의 역사가 이뤄진 현장에는 이를 기억할 만한 어떤 단서나 표석도 찾아볼 수 없다. 서 전 대표와 김 전 위원은 과거 양평동 사옥에서 일어났던 한겨레신문의 창간호 발행과 공안당국의 탄압 사건, 북한 기자들의 집단 방문 등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기념물 정도는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창간 사옥 터 위에 지어진 주거형 오피스텔(월드메르디앙 아파텔)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하는 서형수 전 대표이사와 김형배 전 논설위원.
양평동 사옥 옥상에서 창간 당시의 한겨레신문사 사기를 휘날리고 있는 모습.
양평동 한겨레신문 창간 사옥 터 맞은편에는 아직도 1980년대 당시 세웠던 공장 일부가 헐리지 않고 가동 중이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쇠를 깎는 밀링, 기계제작 등의 업종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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