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경주 선도산 자락에서

김광희 2021. 5.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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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 싫어 떠난 지 35년 만에 다시 시골로 왔다. 닭이 아침을 깨워주고 개가 마을을 지키는 꿈은 상상만으로도 행복이었다. 노인들밖에 안 남은 주민들이 길도 내어 주고 한마디 한마디 거들어 주는 말씀이 기둥이 되고 서까래가 되어 집이 세워졌다. 집들이에 돼지 수육을 솥째 들고 오고, 과일이나 김치 등을 들고 오셔서 동네 잔치를 했다. 개가 너무 짖어서 미안하다니까 시골에 개 키우고 싶어 오지 않았냐고 하신다. 수시로 대문 안에 파가 한 단, 무가 한 단 던져져 있고 담 너머로 떡이 넘어온다. 사람 사는 재미가 난다.

일사일언 삽입

내가 사는 마을의 뒷산인 경주 선도산에는 솔숲 사이로 둥글둥글 고분과 왕릉들이 즐비하다. 나는 태종무열왕을 비롯해 50여 분의 왕·귀족들과 어울려 사는 셈이다. 선도산은 신라 장군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꿈에 서라벌이 잠기도록 오줌을 눈 산이다. 그 꿈을 보희의 동생인 문희가 사고서 왕비가 되었다던가. 설화라지만 얼마나 문학적인가, 정상에 올라갈 때마다 오줌이 마렵지만 서라벌이 잠기는 불경스러운 일이 생길까봐 참는다.

선도산은 해발 390m로 높지는 않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생각한다. 종교 전쟁은 역사 이래로 끊임없는데 선도산에는 정상을 지붕 삼아 마애불과 박혁거세 어머니를 모시는 성모사당과 도덕교 교당과 산신각이 싸움 한 번 없이 나란히 정답게 지내니 이 얼마나 성스럽고 평화로운가. 마을 사람들도 당연히 그 모습처럼 산자락에 오순도순 어울려 산다.

이웃에는 선비들이 학문을 닦던 도봉서당이랑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모시는 서악서원이 있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 최치원의 문학적 정기를 절로 이어받을 것 같다. 백 평도 안 되는 텃밭에는 한번 심어 놓으면 봄마다 올라오는 참나물, 부지깽이 나물, 방풍나물, 참취, 부추 사이사이 두서없이 피고 지는 개양귀비, 봉숭아, 해바라기 지천이다. 고구마, 감자, 마늘, 양파는 수확할 때마다 어쩌면 내 졸작들처럼 그 모양인지, 농사 솜씨도 없으면서 수확 때마다 작품 탈고하는 것처럼 설렌다. 예술은 새롭지 않으면 식상하다. 매일 아침 운동 삼아 조상님 보우하사 무열왕릉에 절하고 몇 바퀴씩 돌면서 일출을 맞는다. 오늘도 새로운 날이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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