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새로운 경제정책, 서둘러야 한다

최민영 경제부장 2021. 5.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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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큰 것(bigness)이 악(惡)’이라는 경제민주화의 기계적 관점에 매몰된 정부가 ‘성장’이라는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소득·자산 양극화라는 불평등 해소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류덕현 중앙대 교수 등이 지난주 서울사회경제연구소·한국경제발전학회 심포지엄에서 내놓은 ‘미래세대를 위한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은 분석과 제안 모두 생각해볼 점이 많다.

최민영 경제부장

이들은 달라진 사회에 맞춰 정부가 “경제성장 정책을 통해 단기간에 성장률을 제고할 수 있다는 방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정부가 직접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목표치를 제시한다. 정부가 달성 여부를 연간, 분기 단위로 발표하는 건 산업화 시대의 관성이지만 요즘은 국가가 성장해도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으니 문제다.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장기적인 경제성장은 “정책목표가 아닌 다양한 정책성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결과”일 뿐인데 주객이 전도됐다. ‘상위 10%’와 ‘나머지 90%’라는 양극화가 임계점에 다다른 오늘날의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경제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경제성장의 과실은 ‘상위 10%’에만 쏠린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장기 과제가 아닌 단기적인 ‘브랜드’ 정책에 집착하면서 시장의 흐름에 역행했다고 진보학자들은 비판한다. ‘최저임금 1만원’을 비롯한 정부의 직접 시장개입, ‘한국형 뉴딜정책’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같은 관 주도의 정책, ‘제로페이’처럼 심판이 선수로 뛰는 경우 등이 그 예로 꼽힌다. 다른 선진국에서 민간 부문이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역동적인 산업개혁이 진행 중일 때 한국에서는 정부가 관성적으로 경제성장을 주도하다가 부작용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 불평등한 구조를 고치는 것이라고 이들 진보학자들은 말한다. 육아 및 교육·주거 복지를 늘려서 ‘일하는 중산층’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청년세대가 중산층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성장계단’을 제공하고, 창업에 실패한 이들과 실업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해 산업 혁신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사회 충격에 대비해서라도 이 같은 개혁은 절박하고 절실하다. 역사를 되짚어볼 때 전쟁과 질병을 비롯한 ‘비금융’ 경제충격의 약 2년 뒤쯤 사회소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분석한 바 있다. 1830년대 초 프랑스 파리 인구의 3%가 한 달 만에 사망한 콜레라 대유행 이후 빈곤층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민중소요가 발생한 것 역시 그 같은 맥락이다. 국제금융기구(IMF)에 따르면 2001년부터 에볼라,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을 비롯한 다섯 번의 팬데믹 이후 전 세계 133개국에서 모두 사회불안이 심화됐다.

그러므로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경제방향 논의는 ‘어떤 유권자층에 얼마큼의 현금지원을 할 것인가’라는 평면적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양극화가 더 심해지면 사회분열을 돌이키기 어려워질 수 있다. 현재의 ‘저부담-저복지’ 국가에서 ‘중부담-중복지’ 국가로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정부는 ‘성장’이 아닌 ‘재분배’와 사회통합을 주도해야 한다.

류 교수 등은 인구 구조변화에 따른 자연증가분 20조원과 불평등·불공정 해소를 위한 지출 50조원 등 연간 70조원(GDP 3.5%)이 추가 복지지출에 필요하다고 분석한다. 기본소득은 ‘월 30만원’이면 올해 보건복지노동 부문 예산(199조원)의 90%에 달하는 재정부담 때문에 현실성이 낮다면서 대안으로 기존 복지를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예로 전국민고용보험제도와 중위소득 청장년 세대에 대한 소득보전 등을 하면 연간 50조원이 든다.

이에 그간 미루고 또 미뤄온 ‘증세’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됐다. 류 교수 등은 “근로소득세 납부자의 평균세율은 5.7%이고, 면세자 비율은 2018년 기준 38.9%에 달한다”며 “소득세에 1~2% 정도의 ‘최저한세’를 도입해 모든 국민이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학계에서는 증세에 앞서 부유층이 혜택을 보는 각종 공제 혜택을 줄여나가는 게 먼저라는 지적도 나온다.

세금을 거둬서 제대로만 쓴다면 정부에 대한 신뢰는 높아지고 조세저항은 낮을 것이다. 지난 실수들을 후회하며 곱씹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양극화 구조 개혁에 정부가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최민영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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