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숲서 별안간 산불..범인은 바로 나무 속 불씨

이정호 기자 2021. 5. 16. 21: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지난해 9월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번진 산불 모습. 최소 수백그루의 세쿼이아 나무가 불에 탔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제공
작년 캘리포니아 산불의 불씨
줄기서 4개월간 잠복하다 발화
기후변화에 무너진 ‘숲 방화벽’
더 큰 재앙 올 가능성에 우려

울창한 산림 한가운데에서 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자세히 보니 연기를 뿜는 ‘굴뚝’은 땅에 뿌리를 박고 선 멀쩡한 나무다. 나무 주변에선 산불이나 등산객의 취사 행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달 초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이 캘리포니아주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촬영해 공개한 ‘이상한 나무’의 모습이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서울 면적의 2.7배에 이르는 1635㎢에 세쿼이아 나무가 가득 들어찬 곳이다.

이곳에선 ‘제너럴 셔먼’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세쿼이아 나무가 유명하다. 높이는 아파트 30층에 맞먹는 84m, 줄기 지름은 11m에 이른다. 부피가 약 1500㎥에 달해 올림픽 규격 수영장 60%를 채운다. 단일 지구 생명체 가운데 덩치가 가장 크다. 제너럴 셔먼 외에도 세쿼이아 국립공원에는 높이 수십m짜리 세쿼이아가 즐비하다. 이런 곳에서 산불의 전초전처럼 보이는 심상치 않은 연기가 확인된 것이다.

■ 죽지 않고 돌아온 ‘작년 산불’

NPS는 연기가 목격된 세쿼이아 나무가 있는 지역에 탐방로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험한 산세 때문에 사람이 들어가 실수나 고의로 불을 내긴 어려운 지점이라는 뜻이다. 여러 요인을 정밀 조사한 끝에 지목된 범인은 뜻밖에도 지난해 캘리포니아를 휩쓴 산불이었다.

지난해 꺼진 산불이 올해 또 산불을 일으켰다니 무슨 말일까. 이 지역은 지난해 8월 시작돼 12월에야 완전히 진화된 초대형 산불에 직격탄을 맞았는데, 이때 최소 수백그루의 세쿼이아가 불탔다. 그런데 진화 작업 뒤 다 꺼진 줄 알았던 불 가운데 일부가 세쿼이아 줄기 안으로 파고든 뒤 무려 4개월 이상 버티며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무 안에 존재하는 산소가 불씨를 위한 피난처 역할을 한 것으로 NPS는 보고 있다.

이렇게 불씨가 잠복하는 일은 자연계에서 종종 일어난다. 지난해 미국 지구물리학회는 북극권 초원인 툰드라에서 일어난 불이 지표면에선 꺼진 뒤에도 얕은 지하에 매장된 석탄의 일종인 토탄(土炭) 속에 파고들어 겨울을 나는 일이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이런 불씨는 봄이 되면 지면 밖으로 나와 다시 화재를 일으킨다.

이달 초 캘리포니아 세쿼이아 국립공원이 공개한 숲속 흰 연기의 모습. 연기는 특별한 발화 요인이 없는데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NPS 제공

■ 동시다발 발화 피해 우려

그런데도 유독 세쿼이아가 자신의 몸속에 불씨를 품었다는 사실에 시선이 쏠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세쿼이아는 불이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내화성(耐火性)이 매우 뛰어난 나무다. 세쿼이아 껍질은 두께가 대개 수십㎝에 이르는 데다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어 확실한 방화벽 역할을 한다. 심지어 세쿼이아 솔방울은 고온의 산불에 노출돼야 내부에 있던 씨앗을 뱉어낸다. 세쿼이아에게 산불은 삶의 일부라는 얘기다. 화염 속에서 비상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이 옷가지나 모포를 물에 푹 적셔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일을 세쿼이아는 일상처럼 준비하는 셈이다.

이런 세쿼이아가 올해는 자신 내부로 불이 파고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넉 달 동안 불씨를 품고 있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이 지역의 건조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고 있다.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레이프 마티센 화재관리 부담당관은 NPS를 통해 “올해 적설량과 강우량이 적었다”며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면 연기가 더 많이 발견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여름은 기후변화로 폭염이 더욱 심해지면서 숲을 바짝 마른 장작처럼 만들고 있다. 세쿼이아 속 불씨가 활개를 펼쳐 산불의 시작 시기가 당겨질 수 있고, 특히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세쿼이아 나무들이 동시다발적인 산불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우후죽순처럼 불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미국 서부 산불은 남한 면적의 4분의 1인 2만4000㎢를 태우며 사상 최대 피해를 기록했는데, 올해 더 큰 재앙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마이크 테우네 세쿼이아 공원 화재정보담당관은 영국 가디언을 통해 “세쿼이아 나무들은 수천년을 살기 때문에 그간 많은 산불을 이겨내왔다”면서도 “기후변화와 가뭄의 영향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