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어디서 감히"
[경향신문]
평상시에는 쓰지 않지만 궁중 사극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말들이 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송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와 같은 말인데, 주로 신하가 임금에게 아뢸 때 쓴다. 거꾸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대사들도 있다. ‘무엄하다’ ‘그러고도 살아남을 듯싶으냐’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등이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태도가 물씬 배어난다. 상하관계가 엄연했던 옛날에나 쓸 수 있었던 말이다.
사극 무대에서 쓰이는 말이 가끔 현실 정치에 소환되기도 한다.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류호정 정의당 의원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문 의원이 류 의원을 향해 “야! 어디서 지금 감히”라고 했다. 문 의원이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의 의사진행 발언에 항의하다 류 의원과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내뱉은 말이다. 문 의원은 “어디서 목소리를 높여”라고도 했다. 그 ‘어디서’가 국회 본회의장이라면 문 의원이 배 원내대표에게 찾아가 해명을 요청한 것부터가 결례이다. 54세의 문 의원이 28세인 류 의원에게 나이가 어리다고 본회의장에서 큰 소리로 훈계하려 든 것도 잘못이다.
‘감히’의 사전적 뜻은 ‘자신의 신분이나 능력 따위를 넘어서서 주제넘게’이다. 사극에서는 ‘어딜 감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된다. 신분이나 계급 차이가 많이 날 때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정의당이 문 의원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당연하다. 나이가 한참 아래라고 류 의원을 무시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의당을 존중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사과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 의원은 오해로 인한 해프닝이라며 사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상대방 의원에게 ‘야!’라고 욕설에 가까운 호칭을 쓰고, ‘감히’라는 무시의 언어를 쓴 것에 어떤 오해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의원들은 회의에서 서로를 지칭할 때 ‘존경하는 ○○○ 의원님’이라고 한다. 영국 의회의 전통을 차용한 것으로, 의원 개개인이 국민을 대표하는 만큼 서로를 절대 존중하라는 의미다. 감히 유권자를 무시하는 사람은 의원이 아니다.
윤호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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