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이 없는 '인생'..예술의 문을 열다

전지현 2021. 5. 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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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가 안규철 개인전
지난해 한예종 정년 퇴임 후
30년 작가 인생 정리해 회고전
보이지 않는 이면에 진실 있다
시인이 단어 골라 시를 쓰듯
사물을 재배치해 미술품으로
예술과 인생으로 들어가는 나무 문 2개와 그 사이 작가 상태를 표현한 나무 의자로 구성된 설치 작품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Ⅱ` 앞에 서 있는 안규철 작가.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부산점 전시장 벽에 나무문 2개가 있다. 독일어 'Kunst(예술)'가 쓰인 문에는 손잡이 다섯 개가 달려 있고, 'Leben(인생)'이 적힌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이곳에서 만난 현대미술가 안규철(66)은 "내 자화상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설치 작품 제목은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Ⅱ'로 199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 재학 시절 처음 만들었다. 미술잡지 '계간미술' 기자를 그만두고 평범한 삶으로부터 떠나와 돌아갈 수 없는 상태를 손잡이가 없는 문으로,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다섯 가지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험에 든 상태를 다섯 개 손잡이 문으로 표현했다. 그 질문은 '예술은 인생보다 중요하냐' '당신은 언제 예술가인가' '무얼 하길래 예술가인가' '한 번 예술가이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나' '매 순간 예술가인가' '예술은 돈인가'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작가는 "예술과 인생 사이 어중간한 상태에 있는 무명 작가로서 내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두 문 사이에 놓인 나무의자가 바로 무명 작가 시절 그를 대변한다. 의자 한쪽 다리만 길고 화분에 꽂혀 있다. 작가는 "의자를 다시 살아있는 나무로 키우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어려운 게 예술"이라며 "삶에서 떠나와 예술과 관련해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내 상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으로 의자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안규철 개인전 전경
어떻게든 저 문을 열고 예술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중추적 작가가 된 비결이다. 1996년 학고재 전시에 이어 이번 회고전 '사물의 뒷모습'을 위해 25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앞만 바라보는 전시 신작을 해왔고, 회고전은 가능하면 안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뒤를 돌아보는 전시를 하게 됐다"며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정년 퇴임하고 코로나19로 집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뭘 해왔고, 뭘 남길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30여 년 작가 여정을 보여주는 회고전 제목을 '사물의 뒷모습'으로 정한 이유는 뭘까. 그는 "진실은 사물의 표면보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 숨어있다"고 했다. 일상과 주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글을 매일 쓰고 생각을 모아 미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번 회고전에 설치, 회화, 드로잉 작품 40여 점을 펼쳤다. 서로를 밟고 있는 구두 세 켤레를 둥글 게 이은 작품 '2/3 사회 Ⅱ'는 사회의 본질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주변인과 엮여야 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딛고 일어서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 밟히기도 한다.

부산 국제갤러리 안규철 개인전 전경
검은 코트 아홉 벌의 소매를 둥글게 연결한 작품 '단결 권력 자유 Ⅱ'는 생각의 차이나 빈부격차로 서로를 가르는 인간 장벽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단결해야 자유를 얻는다'는 의미를 전제로 코트를 이어붙였지만 자아와 타인, 우리와 그들,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타자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회화 '그들이 떠난 곳에서-바다'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당시 작가는 캔버스 200개에 그린 바다 그림을 광주 시내 곳곳에 배치한 후 전시 기간 내내 '그림을 찾습니다'라는 공고를 지역 신문에 냈다. 이때 작가에게 다시 돌아온 그림은 20점 남짓이었고,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는 작품 대부분이 '실종'된 상태로 전시됐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그림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실종자라고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것 같은…"이라고 했다.

단어를 조합해 시를 쓰는 것처럼 사물을 골라 시적인 미술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전시는 7월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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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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