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학살'의 목격자들

한겨레 2021. 5. 1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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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학살'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이 언론에 노출되고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11월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한겨레> 젠더 미디어 '슬랩' 제작)이 계기가 됐다.

유튜브 영상은 90년대생들의 이런 '보상'받지 못한 삶을 한국 사회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했을 뿐,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고 국가가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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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세계+]

[조해진의 세계+]  조해진 ㅣ 소설가

‘조용한 학살’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이 언론에 노출되고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11월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한겨레> 젠더 미디어 ‘슬랩’ 제작)이 계기가 됐다.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라는 제목의 이 영상은 10분이 조금 넘는 재생 시간 내내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들추어낸다. 한국의 90년대생, 그중에서도 여성 자살(시도)률이 코로나19 시대에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것과 그 중요한 원인이 불안정한 고용형태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있다는 우리의 현실 말이다. 영상에서 한 연구자는 90년대생들의 이러한 자살률을 일본의 제국주의를 경험한 전후세대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우려하기도 한다. 지금의 90년대생들이 나이가 들면서도 높은 자살률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영상을 보면서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중략)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서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1943년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이 문장은 서경식의 에세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인용된 바 있다. 1943년이라면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전망이나 희망이 극도로 희박했던 시절이다. 2020년대 한국에서 우리의 소중한 청춘들이 수십년 전의 전쟁세대와 전후세대만큼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못해 쓰라리다.

그렇다면 왜 ‘조용한’ 학살인가.

아이엠에프 외환위기 속에서 태어났거나 유년기를 보낸 90년대생들은 이전의 그 어떤 세대보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끊임없이 스펙 쌓기에 매진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사회에 나올 무렵인 2000년대 후반엔 경제불황이 장기화된 상태였고 금융위기가 닥쳤으며 신생 일자리는 비정규직 위주로 짜여 있었다. 대다수의 90년대생들은 노력한 만큼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고 여성의 경우엔 ‘보조’이거나 ‘잉여’ 노동자라는 성차별적 선입견에도 직면해야 했다. 유튜브 영상은 90년대생들의 이런 ‘보상’받지 못한 삶을 한국 사회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했을 뿐,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고 국가가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현재 청년 지원책은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과 출산을 해야 자격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갈 입장권조차 얻지 못한 90년대생들의 좌절은 ‘조용’하게 치러졌고 그 좌절에 대한 반응 역시 조용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누군가는 고용 불안이나 자살 충동이 90년대생에게 국한되지 않는다고, 그들이 다른 세대보다 나약한 것도 문제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우울과 좌절을 겪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90년대생들이 특별히 나약해서 ‘조용한 학살’이라는 슬프도록 잔혹한 현상이 시작된 건 아님을 우리 사회가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이다. 90년대생들의 문제를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시그널이 있을 때 한 조각이나마 희망이 싹트지 않겠는가.

자살은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테러’한다. 90년대생들이 선택하는 이 마지막 ‘조용한’ 테러는 슬프다. 나는, 우리는, 더 이상 이 자기파괴적인 테러의 목격자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그 짐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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