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환상을 깨다..'환타지 없는 여행' [북적북적]

심영구 기자 2021. 5.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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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sbs.co.kr/d/?id=N1006320378 ]

북적북적 291: 여행의 환상을 깨다…'환타지 없는 여행'
 
"어쩌면 당신 역시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여행을 하면서 찾아낸 최선의 답이다. 여행하는 삶이란, 여행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오는 삶이다. 여행은 오직 이 전제 아래에서만 현실이 된다."
 
'기억이 선물이라면 망각은 축복이다', 혹은 '망각은 축복이지만 기억은 의지다'. 살면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후회할 만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기가 어렵죠. 그러나 시간이, 세월이 약이 돼 준다는 것, 즉 인간의 저 서서히 잊어버리는 능력이 축복과 같은 순작용을 한다는 의미죠. '남이 베푼 것은 잊지 말고 원한은 잊어버리라'는 말도 비슷한 뜻 같습니다.
 
여행에 관한 책을 놓고 뚱딴지 같이 무슨 얘기냐 싶으신가요? 이 책을 읽으며 제가 갖고 있는 여행에 대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갑작스러운(모든 사건은 갑작스럽습니다) 재난에 가까운 돌발상황에 고생했던 여행(주로 출장이 그렇죠)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체로 좋은 기억으로만 윤색돼 남은 것들이 많습니다. '여행은 늘 설레고 즐겁고 신나는 것'이라는 어떤 환상을 갖게 되는 건 그래서일까요. 여행의 반대말이 '일상'이라는 의미도 그렇고요.
 
한편으로는, 이런 환상이 너무 없는 여행도 좀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주로 가족 여행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가는 데 가기도 싫고 가서도 고생, 다녀와도 그냥 그랬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한 마디로 '멍'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코로나 시국에 국내 괜찮은 여행지를 재발견했다는 경험담도, 그래도 어서 해외를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소망도 넘쳐납니다. 여행에 대한 환상은 어느 정도까지 여야 할까요.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여행작가 환타 전명윤의 <환타지 없는 여행>입니다.
 
그 선배가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는 내 또래의 여행자에게 현자 같은 이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 한민족의 문화 이동 경로가 궁금해졌다며 모든 걸 훌훌 털고 십수 년째 길을 떠도는 사람이었다...
 
"환타야,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두렵다."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날이 밝도록 독한 위스키를 들이부어도 다음 날이면 다시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길에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는 그게 가능한지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환타 작가는 인도나 홍콩, 일본 오키나와, 중국 상하이 등 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여행책을 찾아보신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일 겁니다. 저도 예전 기억을 떠올려보니 환타 작가의 책을 길잡이 삼았던 일이 여러 번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름이 '환타(幻打)', 환상을 깨뜨린다는 뜻인 줄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떠나면 행복해진다'라는 환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상에 지친 사람을 빨아들인다. 여기에 쿨하게 때려치우고 당장 떠나라고 말하던 과거의 내가 겹쳐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는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꿈꾸게 하는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제대로 안내해야 하는 나에게는 서바이벌 키트 혹은 만능 구급상자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쓴 가이드북은 늘 잔소리로 넘쳐난다. 지도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현지인에게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의 지갑이 그곳의 지폐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거듭 이야기하는 이유다

많은 분들이 그러겠지만 저 또한 사회인이 된 뒤 학생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행(출장 포함)을 다니게 됐습니다. 해외에 처음 나갔던 것도 회사 다니면서부터였고요. 자금은 어느 정도 늘어난 반면, 줄어든 건 시간, 그리고 체력이었죠. 그러다 보니 '가성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고 시행착오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누군가의 뒤를 쫓아 바쁘게 다니던 여행을... 그러던 걸 몇 년 전부터는 조금 내려놨습니다.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보지 뭐, 다음에도 못 가면? 아쉬운 대로 두지 뭐.
 
여행에 대한 막연한 환상 외에, 좀 더 구체적인 환상도 있죠. 달리 말하면 선입견이나 얇은 지식(업데이트되지 않은)이라고도 할까요. 인도환타, 홍콩환타, 오끼나와환타 등으로 불릴 정도로 지역 전문가 반열에 오른 작가라서 가능했던 글 같습니다.
 
2014년 6월 인도의 모디 총리는 "힌두 사원보다 화장실을 먼저 짓겠다"는 다소 이색적인 발언을 했다. 이는 같은 해 5월 인도 북부 비하르주에서 한밤에 들판으로 용변을 보러 간 14세, 17세 사촌 자매가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사건에 대한 대응 조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 인도에는 약 9,000만 개의 화장실이 새로 생겼다... 어쨌거나 화장실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점만큼은 이론이 없다. 놀라운 사실은 같은 기간에 여성 대상 성범죄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5년 뒤에 확인한 통계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인도에 대해 꽤 안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나조차도 그들의 현실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봤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도 아주 중요한 행간이 있다. 2012년 12월 뉴델리에서 발생한 강간 피해자 사망 사건 당시 각 언론사 여성 기자의 눈부신 활약이 이제야 회자되고 있다. 여성의 강간 피해에 무감각했던 인도 언론을 움직인 건 바로 그들이다. 그 결과 언론이 눈을 떴고 시민이 봉기했으며 정부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노력이 더해져 침묵으로 일관해온 성폭력 사건에 비로소 보도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
 
작가는 최근 <리멤버 홍콩>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처음엔 홍콩 가이드북의 새로운 버전인가 싶었지만, 부제는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2020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우리가 알던 홍콩은 사라졌다며 자신이 쓰는 마지막 홍콩에 대한 책이라고 합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을 읽으면서 비로소 왜 환타 작가의 여행책이 다른 가이드북과 다르게 기억되는지를 새삼 느꼈는데 <리멤버 홍콩>에서는 더욱 절감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 책도 북적북적에서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행작가가 지역의 문제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누군가에겐 맛집을 찾기 위해 뒤적이는 정보 조각의 모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 현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담아내고 싶다.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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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구 기자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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