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터뷰] '손아섭 작명소'에 직접 물어봤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름이란 무엇인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프로야구 KT 중견수 배정대(26)는 이름 바꾸고 꽃 핀 선수다. 2014년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 뽑힐 때만해도 이름이 배병옥이었다. 입단하자마자 “프로 선수 중에 고교 시절 4번 타자 안 쳐본 사람없고, 천재 중의 천재만 살아남는게 1군 주전 명단”이라는 야구계 속설을 피부로 느꼈다. 군 복무로 경찰야구단에서 뛰던 3년 전 이름을 ‘빼어날 정(挺)’에 ‘햇빛 대(旲)’로 바꿨고, KT 주전 중견수로 입지를 굳혔다. 지난해엔 정규리그 전 경기(144경기) 출장에 팀의 첫 가을야구 진출까지 이끌며 억대 연봉자가 됐고, 올해는 도쿄 올림픽 태극마크를 꿈꾼다. 올 초 인터뷰했던 그에게 “어디서 이름을 바꿨냐”고 묻자 “손아섭 선배가 개명했던 곳에서 했다”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 2월 제주도. SSG의 창단 첫 스프링캠프 훈련장에서 한동민(32)으로 익숙했던 선수는 ‘한유섬’으로 변해있었다. ‘수유나무 유(萸)’에 ‘해돋을 섬(暹)’을 쓰는 새 이름은 ‘나무 위에 해가 떠 있다’는 뜻으로 “내 모든 것을 바꿔서라도 더는 안 다치고 야구만 잘 하고 싶어서 개명했다”고 했다. 그는 상무 시절 팔꿈치 인대를 수술했고, 29홈런을 친 2017년에는 생일 하루 전날 발목 인대가 끊어졌다. 이듬해 홈런 41개로 부활해 팀 우승을 이끌었지만 최근 2년간은 정강이뼈 골절, 왼손 인대 파열 등 굴곡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부상이 지긋지긋했으면 서른이 넘었고 이름도 제법 알려진 선수가 개명을 결정했을지 안쓰러웠다. 그도 말했다. “손아섭 선배가 개명했던 곳에서 했어요.”
◇한번 가보자, 손아섭의 그 작명소로
그래서 한번 꼭 가보자고 결심했다. 그 손아섭(33·롯데)이 이름 바꾼 곳으로. 요즘엔 땅볼 일색이라 롯데 팬들이 ‘손땅섭’이라 놀리지만, 손아섭은 한국 프로야구의 개명(改名) 역사를 새로 쓴 선수다. 손광민으로 뛴 2년간(2007~2008년) 타율 0.147 3홈런 2도루에 그쳤던 그는 2009년 손아섭으로 변신하고 KBO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타자로 성장했다. 지난 12년간(2009~2020년) 타율 0.332 159홈런 813도루로 맹활약해 국가대표에도 승선했고, 4년 전엔 롯데와 총액 98억원 대박 FA 계약을 맺었다.
그의 성공 이후 강로한(롯데)·오태곤(SSG)·오주원(키움)·진해수(LG)·장시환(한화) 등이 줄줄이 개명했다. 1982년 KBO리그 출범 첫해부터 2008년까지 개명한 프로 선수는 6명뿐이었는데, 2010~2020년 사이에 78명이 이름을 바꿨다. 개명을 결심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손아섭을 따라 부산 연산역 근처 ‘한글음파이름학회’ 사무소로 간다. “도대체 어떻게 이름을 짓길래 이렇게 선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나”하는 순전한 호기심에 기자도 최근 여길 가봤다. 아래의 내용은 기자처럼 작명소 사정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취재한 것들을 ‘그저 옮긴 것’이다.
외관이 카페처럼 아늑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니 한글음파이론의 주창자인 한효섭(75)씨와 그의 제자인 윤예심·조서목씨가 인사했다(사무소 내 직함은 한씨가 총재, 윤씨가 회장, 조씨가 원장이지만 편의상 생략). 실내 벽 한 켠에 까까머리 손아섭이 이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걸려있었다.
한씨가 이 사진을 가리키며 “개명 직후 촬영한 것으로, 이 때 손아섭 선수는 정말 야구를 그만둬야하나 고민하는 기로에서 우리를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아섭(兒葉)은 ‘땅 위에서 최고가 되는 아이’라는 뜻이다. 한씨는 “손아섭 선수에게 개명 첫 해인 2009년에도 야구가 잘 안될거다. 하지만 한 해만 딱 참고 버티면 뜻대로 다 될 테니 고비를 꼭 넘기라고 했고, 그대로 됐다”고 했다.
실제로 손아섭은 2009년에도 타율 0.186 3홈런에 그쳤지만, 이듬해부터 3할 타자로 성장해 2014·2018 아시안게임 야구 금메달과 2013·2017 WBC 대표팀 등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타자로 우뚝 섰다. 한씨는 “손아섭의 현재 등 번호 ’31′번도 우리가 음파를 고려해 정해준 것이다. ‘삼십일’이라고 발음할 때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결혼·이사 등 중요한 날짜 택일과 전화번호까지 모두 음파 상담 대상”이라고 했다.
◇어서와 ‘한글음파’는 처음이지?
작명 진행 방식이 궁금했다. 조씨가 사전 상담 담당이다. 그가 의뢰인마다 30분~1시간씩 대화하며 직업과 생년 월일, 가족 관계, 개명 목적 등을 꼼꼼히 기록한 상담 노트를 작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윤씨와 한씨가 함께 일주일간 새 이름 후보 2~3개를 짓고, 의뢰인이 최종 1개를 선택한다. 새 이름은 한글부터 짓고, 이후 사주명리를 고려해 한자를 정한다고 했다. 윤씨는 “본명이 대부분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온 정성을 기울여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 이름을 새로 바꾸는 작업이니 새 이름을 정하는 일주일간 저희도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상가 조문도 삼간다”고 말했다.
작명 원리는 무엇일까. 음파의 데시벨(dB) 변화를 미묘하게 측정해 따지는 과학적인 방법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일러 방정식처럼 수리 계산식이 있는 것일까. 이들은 “자체 연구한 한글음파이론의 7대 이론과 선천적 5대 조건, 후천적 11대 변화를 모두 따진 ’23대 이론'을 가지고 상담한다”면서 “오랜 임상 연구로 유형을 나누는 노하우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특별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기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자의 이름(양지혜)를 예시로 1차 풀이를 해봤다. 사전 상담에 쓰이는 노트엔 ㄱ·ㅋ(어금닛소리)/ㅁ·ㅂ·ㅍ(입술소리)/ㅅ·ㅈ·ㅊ(잇소리)/ㅇ·ㅎ(목구멍소리)/ㄴ·ㄷ·ㄹ·ㅌ(혓소리) 자음이 각각 한 쌍으로 묶여 오각형의 각 꼭짓점에 배치된 표가 그려져 있었다. 이 소리가 서로 만나 새로운 소리를 만들며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이롭게 만나면 순기능이고 해롭게 만나면 역기능이다.(사진). 기자 이름의 대표 자음인 ‘ㅇㅈㅎ’을 이 틀에 대입해봤다. 오각형의 바닥만 서로 잇는 선분이 나왔다. 평가는? “성격은 급하고 바삐 사는데 실속은 없겠네요. 항상 무언가를 쫓아다니며 살겠어요.” (이것은 기자직에 대한 한줄 평과 다름없다. 혹시 한글음파이론이 다 맞는 얘기인걸까. 갑자기 솔깃해졌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주기능음파수’와 ‘부기능음파수’를 따진다(원리는 아래의 사진 참고. 글로 설명하기가 불가능이다). 기자의 이름은 주기능음파수가 ’00,7x,0x’로, 부기능음파수가 ’88,5x,8x’로 측정되었다. 이 유형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고, 사업에 부적합하니 직장생활을 해야하고, 배신을 잘 당하며, 의사나 운전계통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헉!) 다치거나 질병으로 인해 수술받는 경우가 생긴다는 풀이가 나왔다. 물론 좋은 얘기도 몇 개 있었지만 생략하겠다.
한글의 자·모음은 발음이 정확하기에 외국어도 한글음파로 변환하면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래는 기자의 눈에 신기하게(?) 보였던 분석 사례들이다.
◇개명이 끝이 아니다, ‘노오력’이 중요해!
도대체 이름은 왜 바꾸는 것일까. 조씨는 “우리가 성형 수술을 열 번 받아도 김태희처럼 예뻐지지는 못하지만, 본판보다는 예뻐진다. 그처럼 개명은 후천적으로 보완 효과가 있다”면서 “이름은 사주·관상처럼 타고나는게 아니어서 자기에게 맞는 이름이 중요하다. 그리고 개명하면 많이 불릴수록 에너지가 더 크게 발산한다. 운동선수나 연예인, 정치인 등 대중적인 직업군에서 개명 효과가 유독 크게 나타나는 이유”라고 말했다.
아무튼 이런 여러가지 이론을 통해 손아섭이 탄생했다. 남자 육상선수 박봉고도 여기서 이름을 ‘클 태(太)’에 ‘세울 건(建)’, 박태건(30)으로 바꾸고 2018년 한국 육상 남자 200m 신기록(20초40)을 세웠다.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기록(장재근·20초41)을 33년만에 갈아치웠다.
조씨는 “따로 홍보를 하지 않는데도 ‘손아섭 효과’로 먼저 알고 찾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하다”며 “제주도 등 전국 각지는 물론 미국에서도 전화 상담이 잇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기계적인 대량 생산이 아니어서 하루에 많게는 8명밖에 상담을 소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약이 일주일 이상 밀려있기도 한다”고 했다. 사람 이름뿐만 아니라 가게나 회사 이름도 문의 대상이다. 얼마 전엔 트로트 가수 이찬원의 팬클럽이 찾아와 “부와 명예만 가득하게 해달라”고 작명을 부탁하고 갔다고 했다. 작명 비용은 회당 35만원이다.
이름만 바꾸면 무조건 잘 되는걸까. 이들은 “손아섭 선수의 최고 장점이 성실함이었다. 덕분에 개명이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면서 “본인의 노력이 걸맞게 반드시 뒤따라야한다. 이름만 바뀐다고 자동으로 사람이 달라지는게 아니다. 개명은 새 마음 새 뜻으로 임하게 해주는 계기 정도로 생각하는게 좋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누구나에게 개명 효과가 드라마처럼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개명 전인 2018년 41홈런을 몰아치고 한국시리즈 MVP까지 됐던 한유섬은 올해 타율 0.264 3홈런에 머물러 있다. 롯데 선수들도 대부분 여기서 개명했는데 팀은 올해 리그 꼴찌다. 그렇다. 롯데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이들이 보는 좋은 이름을 가진 야구 선수가 궁금했다. “이대호(롯데)와 오승환(삼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강인함과 차분함을 동시에 갖춘 이름”이라서다. 특히 이대호는 힘이 타고난 이름이라고 했다(그의 친형 이차호씨는 ‘이시맥’으로 개명했다).
참고로 한글음파이론 주창자인 한효섭씨는 본명이 한석봉으로,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현재의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다. 부산 한얼고 이사장으로,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한성주의 아버지로도 알려져있다. 평소 한글음파이론을 계속 연구하다 2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작명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모님이 최고로 정성껏 지어주셨을텐데, 옥고(1993년 재단 공금횡령과 선거운동에 교사를 동원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등을 치르며 인생에 왜 이렇게 풍파가 많은지 고민하다가 음파의 원리에 따라 ‘효섭’으로 개명했다”며 “이름도 경쟁력이다. 이름을 바꾸면 환경을 바꿀 힘이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경쟁 치열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 여자프로골프(KLPGA)에선 개명한 선수가 무려 297명이나 있다. 개명은 법원에서 신청 허가를 받는 것도 꽤나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그 이후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휴대전화 등 수 많은 명의 변경 절차를 감수해야한다. 어쨌든 그만큼 변화가 절실해 인생에 승부수를 던지고픈 사람들이 개명을 선택한다.
이름이 무엇이든 어떠랴.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오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향기나는 존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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