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늙을지도 모르는데..떨떠름한 'K-할머니' 전성시대
(10) 무사히 할머니
멋진 할머니 모습에 환호하는 한편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한국 할머니’가 이렇게 화려한 조명을 받은 적이 있었나? “최고보다는 최중이고 싶다”며 멋지게 오스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배우 윤여정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8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밀라노 할머니) 장명숙도 있고, 1947년생으로 윤여정과 동갑인 유튜버 박막례(구독자 131만)도 있다. 밀라논나는 새 옷을 사지 않기 위해 체중 관리를 하며, 80년 된 아버지의 면 셔츠를 조심스럽게 빨고 다려서 입는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비녀를 브로치로 만들고 옛날 옷들을 고쳐 입고 쓰면서 나만의 것으로 재탄생시킨다. 플라스틱을 쓰지 않기 위해 고체 비누 샴푸를 구입하며 일회용기 뚜껑을 모아 두었다가 반찬그릇 덮개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습이 궁색하지 않고 누구보다 아름답다. 스스로 “할머니”라고 칭하지만, 조곤조곤한 말투로 인생을 상담해주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언니’ 또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곁으로 가서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진다.
‘코리아 그랜마’ 박막례는 또 어떤가. 어떤 코미디언도 따라잡지 못할 웃음이 그의 영상엔 있다. 드라마를 보며 툭툭 던지는 자유로운 리액션, 요리를 하며 분방하게 던지는 욕설, 손녀인 유라에게 내미는 투박한 듯 다정함을 목격하고 있자면 경탄이 절로 튀어나온다. 2019년 그는 구글 본사의 초대를 받아 최고경영자 순다르 피차이를 만났고, 유튜브 최고경영자 수전 워치츠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행복하다 외쳤고, 미국 패션지 <보그>와 인터뷰하면서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2017년 5월1일 업로드한 ‘근로자의 날에 일한 당신에게 된장찌개 에이에스엠아르(ASMR, 주로 오감을 통한 쾌감 느끼기)’ 편은 90만명이 넘는 사람이 보았다. “근로자의 날인데 너는 일허냐?” 밤늦게 밥도 못 먹고 들어온 손녀가 안쓰러워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같이 몇 수저라도 하려는 모습에 눈물이 난다며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화장실 못 가도록 밥 굶어가면서 일했는데 할머니 말씀에 울었어요”, “나도 눈물이 뚝뚝…”, “한동안 엄청 울었네.”
무사히 무난한 할머니가 되고픈데
여성 노인빈곤율 OECD 최고 수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할머니들’에 열광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할머니상은 전형적이었다. 따뜻하거나, 불쌍하거나, 욕쟁이라도 음식맛만은 좋다거나, 불행하거나. 요즘 분위기 덕분에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좀 더 다양하고 멋진 할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마냥 마음이 편치는 않다. 누구나 그런 멋진 할머니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의 여성 20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알음알음으로 답변자를 구했으니 이 세대의 정확한 특징을 학자가 연구하듯 밝혀낼 순 없겠지만 자신의 미래상에 대한 생각의 윤곽만큼은 알아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전자우편과 전화 통화, 대면 접촉의 방법을 총동원해 이렇게 질문했다.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어?”
응답자들은 거의 모두가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선 한동안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작사·작곡한 노래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의 가사다. 질문에 답한 사람들 절반 이상이 이 노래를 인용하며 ‘노인이 되기까지 걸어가야 할 내 미래가 염려된다’고 말했다. “지금 사회에서 노인들이 제구실을 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잖아. 윤여정은 특이한 케이스지. 많은 할머니들이 거리에서 폐지를 줍거나 리어카를 끌면서 계속 힘든 일을 하잖아. 나이 들어서 눈도 어둡고, 걸음도 느려지고 하면 어떡할 거야. 폐지 줍는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 같아.” (33살, ㅇ)
이들이 소환하는 ‘할머니로서의 삶’은 멋진 노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병상에, 거리에, 리어카 뒤에, 지하철역 앞과 시장 앞 그늘막에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으로 ‘할머니’를 묘사했다.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 예측하는 노년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 “그냥 늙어서 힘들기 전에 죽고 싶어.” 32살 ㅈ은 이렇게 답했다. “아프고 싶지 않아”, “가난하고 싶지 않아”, “외롭고 싶지 않아.” 모두 짜기라도 한 듯 같은 대답을 했다. 지금 많은 것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앞으로 무엇을 더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 건강과 경제적 안정감 그리고 누군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대답에 깃들어 있었다.
“최근에 운동을 시작했어.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80살 넘어서도 운동하는 할머니 얘기를 봤는데 자극이 되더라. 늙으면 아프고, 아플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사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어. 꾸준히 하면 건강하게 늙을 수 있지 않을까?” (33살, ㅈ)
“아픈 게 제일 걱정 돼. 그런 농담도 있잖아. 유병장수하라는 게 최고의 욕이라고. 유병장수할 바에는 차라리 안 아프고 일찍 죽는 게 낫지. 나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을 건데, 아프면 누가 나를 책임져?” (30살, ㄱ)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건강 상태에 대한 주관적 판단은 매우 부정적인 편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를 보면, 2017년 기준 한국 노인의 주관적 건강 상태(스스로 건강 상태가 ‘좋다’ ‘매우 좋다’로 답한 비율)는 18.5%,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0위로 낮은 편이었다.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는 70%를 넘었다. 2016년 기준 한국 노인의 자살률은 65~69살, 70~74살, 75~79살, 80~84살까지 모든 연령층에서 오이시디 회원국 중 현저히 높은 1위인데 특히 65~69살의 경우 오이시디 평균의 4배, 80~84살의 노인 자살률은 7배에 이른다.
혈연 아닌 가족 내겐 너무 필요해
다양한 가족 인정 제도화됐으면
가족도 국가도 못 기대면 어떡해
“결혼은 안 하고 싶고, 애도 안 낳고 싶어. 물론 연애는 하겠지만, 나이가 들어서 아프거나 외로울 때 내 주변 사람들은 다 결혼한 상황이면 어쩌지 싶어. 친구들하고 다 같이 실버타운 들어가자고 약속하긴 했는데, 걔네가 다 약속 어기면 어떡하냐고.” (29살, ㄷ)
비혼을 선택하긴 했지만 적당한 공동체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 아무리 준비해도 충분하지 않을 ‘노후 대비’ 역시 고민의 핵심에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갑자기 일을 하지 못하게 됐을 때 사적인 공동체인 가족이나 국가 또는 지역사회가 자신을 보호하고 기댈 곳이 되리라는 기대 또한 갖고 있지 않기에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여러 형태의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제도가 없다는 것도 이들이 겪는 ‘노후 불안’의 한 축이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가족은 딱 정해진 형태인 경우가 많고, 동성 친구들하고 사는 건 (가족으로) 인정이 안 되는데, (가족)제도로 딱 묶이지 않으면 아무래도 약속이 오래가기 어렵잖아.” (29살, ㅈ)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윤여정은 서울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판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 역으로 등장한다. 성판매를 하던 중 소영은 실제로 자신을 대신 죽여달라는 노인을 만나기도 하고, 작은 공동체를 만들기도 하다가 결국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소영은 가족 비슷한 것을 꾸리지만, 제도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비정상’ 가족인 터라 그는 무연고자로 쓸쓸히 마지막을 맞이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꼭 일을 계속 하고 싶어. 우리나라는 보통 60대 되면 은퇴하고 그 이후로 삶이 갑자기 내리막길이 되는 거 같아. 무서워. 갑자기 빈곤층으로 확 떨어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35살, ㄱ)
그는 ‘일하는 노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가난이 두렵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경력을 쭉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오늘날 노인의 상황만 살펴봐도 미래에 대한 낙관을 품기는 어렵다. 통계청의 ‘2020 고령자 통계’를 보면, 2019년 기준 65살 이상 고령자 가운데 노후를 준비하거나 준비되었다는 여성은 39.3%에 그쳤다. 남성은 60.9%가 그렇다고 답했다. 2020년 노령연금 수급자 중 여성 수급자는 전체의 34.7%에 머물렀다. 그나마 5년 전에 견줘 49%가 늘었다고 한다. 여성은 전반적으로 높은 노인빈곤율을 경험하고 있기에 중고령 여성들의 노동과 소득 보장이 중요하다고 밝히는 연구들이 적지 않다. 한국 여성 노인빈곤율은 오이시디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며 여성은 정규직에 근무했더라도 65살 이후 빈곤율이 남성에 비해 네 배 이상 높다.(이주미·김태완, ‘노인빈곤 원인에 대한 고찰’, <보건사회연구>)
젊음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조금은 겸허해진다. 오지 않은 늙음을 상상하기만 해도 왈칵 겁이 난다. 많은 언론이 ‘할머니 열풍’을 부르짖는 속에서, 어쩐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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