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동 만화가가 눈물로 원고 적시며 그려낸 동심 이야기
[경향신문]
만화가 박수동 화백(79)을 만난 5월 10일, 충북 음성에 도착하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속을 뚫고 마중 나온 박 화백은 만능 스포츠맨이라 불렸던 젊은 시절이 무색하지 않게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다. 작은 성냥개비를 쥐고 먹물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는 명성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툼한 손도 여전히 건강한 그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 박 화백은 13년 전 현재 살고 있는 음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현역에서도 물러났다. 그럼에도 그의 만화 캐릭터는 젊은 세대에게도 익숙하다. 아직도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빙과계의 스테디셀러 ‘스크류바’와 ‘빠삐코’가 그의 작품 <고인돌>의 캐릭터를 이용해 마케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성적인 상상력을 자유롭고 유쾌하게 표현한 성인만화 <고인돌>을 비롯해 어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명랑만화 <번데기 야구단>, <홍길동과 헤딩박>, <신판 오성과 한음> 등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박 화백을 자택 인근의 한 식당에서 만나 창작활동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들어봤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연재는 안 하는 걸로 아는데 계속 펜을 놓지 않고 있나.
“이곳(충북 음성)으로 이사오면서 작품활동은 다 접었다. 그래도 집에서 재미삼아 그림은 그리고 있다. 텃밭에서 농사도 조금 짓고. 요즘 주된 일과는 ‘택배’ 갖다주는 일이다.”
-택배 일을 하신다고?
“마을이 10가구 정도 사는 조용한 곳이다. 사람들 발길이 드물어 오르기 좋은 뒷산이 있는데 매일 자전거 타고 오르는 길에 동네 개들과 고양이들을 자주 만난다. 우리 집 남의 집 가리지 않고 얘들한테 매일 간식 갖다주는 ‘택배’ 일이 내 본업처럼 됐다(웃음). 이런 한적한 동네에 온 게 사람들과는 더 많이 엮이고 싶지 않아도 동물과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동네 정자에 참새가 집을 지어놨는데 걔들 사이에서 내가 대장 노릇하지. 집채만 한 큰 개들도 아침저녁 두 번씩 간식 갖다주니 강아지처럼 나한테 안기고, 동네 개와 고양이들이 하루종일 나만 기다려. 그러니 그만 줄 수도 없고. 내 연금이 다 얘들 간식비로 나간다.”
-만화가에게도 따로 연금이 있나.
“‘스크류바’랑 ‘빠삐코’로 빙과업체에서 들어오는 돈이 내 연금이지. 처음 광고 시작한 때가 ‘마니나’라는 빙과로 1979년부터 했거든. 햇수로 따지면 40년이 넘었다. 2년마다 꼬박꼬박 계약 갱신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고인돌> 캐릭터 나오는 그 광고 시리즈도 만화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다.
“‘이상하게 생겼네~’ 하는 광고 노래로 유명하지. 처음 광고 만들 때는 광고용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자와 제과회사 사람들이랑 모여 아이디어 회의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작곡가 김도향씨가 녹음할 때 으리으리한 스튜디오에 가서 구경했던 기억도 나고.”
-1965년 데뷔를 했고 초기엔 명랑만화를 주로 그렸다. 어린 독자들을 위한 만화를 택한 계기가 있나.
“첫 데뷔는 공모전에서 준당선이 돼서 하게 됐다. 그때 당선한 사람이 사이로 작가였다. 이후 시사만화를 그린 적도 있다. 1967년에 경향신문에 <박고구>란 4컷 만화를 3개월 정도 그렸다. 처음부터 난 정치나 시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려달라고 청탁이 들어온 걸 내가 막 못 그리겠다고 고사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항복을 했지. 그리면서 시사만화 그리던 오룡(오용묵) 화백과 만나 시사만화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한 코치도 받았고. 그런데 시사만화는 더 못 그리겠어서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애초에 초등학교 교편 잡으면서 아이들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서 만화가 한 거였으니.”
-사범학교 졸업 후 경남에서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 만화가가 됐다던데.
“초등학교 있을 때 많이 관찰했던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외우고 만화로 그리려고 했지. 사범학교에서 배운 게 페스탈로치처럼 아이들을 감싸고 보듬어줘야 한다는 그런 가르침이어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당시 기억이 아직 남은 장면 중 하나는 학생들이 소풍 때 선생님 주겠다고 사이다 한병을 손에 꼭 쥐고 들고 와서 건네주던 그런 귀여운 기억들, 한 학교에서는 1년 만에 전근을 가게 됐는데 학교 운동장 앞에서부터 버스 정류장까지 신작로를 따라 줄을 서서 환송해주던 그런 참 옛날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번데기 야구단>에도 등장인물 ‘물꽁’네 집이 가난해 간식으로 나오는 번데기를 주머니 가득 채워 동생들 주려다가 동료들에게 걸리는 장면이 기억난다.
“그 시절엔 그렇게 어려운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어. 중학교 갈 때 보태주고 그랬지. 그 시절 기억이 사실 만화가 시절보다 내 인생에서 더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아이들이랑 모여서 노는 게 좋아 일요일에도 모아놓고 피구도 하고 냇가에 가서 목욕하고, 옆에 철길로 지나가는 기차 보면서 박수치며 좋아하던 기억.”
-그런 기억들이 명랑만화 그릴 때 소재가 됐겠다.
“한 학교에서 배구를 가르쳤거든. 그러다 애들이 잘해 도 대회도 나가고 그러니까 다른 학교에서 와서 나를 모셔간다고 나름 영전을 하기도 하고 그랬지. 그런 모습이 <번데기 야구단> 마지막에 감독 ‘복할배’를 헹가래치는 장면 그릴 때랑 연결되더라. 특히 <번데기 야구단> 그리면서 내가 많이 울었거든. 눈물이 원고에 떨어져 먹물이 번지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화이트로 칠해 편집부에 보낸 기억이 나네.”
-만화가 생활이 너무 힘들진 않았나.
“바쁘긴 했지. 한창 연재를 많이 할 때 몇군데씩 하고, 주간지만 해도 일주일에 2편 이상 그리는 곳도 있었고. 몰릴 때는 한 번에 40편 넘게 그릴 정도였으니. 그때는 돈 벌어 빨리 집 사야지 하는 생각에 그랬어.”
-그렇게 명랑만화로 인기를 끌다가 <고인돌>부터 성인만화로 노선을 바꿨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성인만화지만 ‘섹스’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성을 그리려고 했던 거지. 만화를 그리다가 중간에 한 6~7년 정도 편집기자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화계에서 조금 떨어져 만화를 보다가 어느 날 헌책방에서 미국 작가 조니 하트의 <기원전>이란 만화를 봤다. <고인돌>이랑 비슷한 원시인 나오는 만화여서 그 만화를 본 게 구상에 영향을 미쳤다. 이쪽으로 한번 새로운 만화를 개발해봐야겠다 싶었어. 그때 같이 일하던 직원이 하근찬 소설가였는데 조언을 많이 해줬다.”
-<고인돌> 특유의 그림체는 성냥개비에 먹물을 찍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하근찬 작가가 원고 편집할 때 바쁘니까 성냥개비 같은 것으로 먹물 찍어 원고 고치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작품 전체를 성냥개비로 그리는 건 아니고 제목이나 표지 정도만 했지. 나머지는 펜으로.”
-문하생 시절을 거치지도 않았으니 독특한 만화 그림체는 스스로 개발한 거겠다.
“내가 사범학교 다닐 시절 첫 아르바이트가 우리 할머니 부적 그리는 일을 도운 거였다. 그때 할머니가 ‘속기(俗氣)’를 빼고 그리라고 했다고. 부적을 그릴 때 이렇게 두리뭉술하게 힘을 빼고 그리라는 얘기였지. 부적은 ‘귀신불침부’, ‘부부화목부’ 이런 식으로 베낄 수 있는 그림첩이 있거든. 그거 보면서 선을 쫙쫙 세게 긋는 게 아니라 두리뭉술하게 그리는 법을 익혔어.”
-열성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사항 중에 <번데기 야구단>이나 <고인돌>을 첫 판본 이후 새로 복간해 출판할 때 일부 내용이 빠졌다는 점이 있다. 왜 빠졌는지 사연이 있나.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출판사에서 찍을 때 계획한 페이지 분량이랑 안 맞아 일부 덜어냈지 않았을까. 나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고, 다만 <오성과 한음>에선 오성이가 화장실 가서 큰일을 보는 장면에서 엉덩이가 나왔다고 그걸 편집부에서 지운 적은 있다. 그것 말고도 <고인돌> 중 한편을 가지고 당시 공보부에서 나와서 트집 잡은 기억도 나고.”
-어떤 점 때문에 트집이 잡혔나.
“뱀과 지렁이가 나오는 얘기였다. 둘이 길을 가다 만났는데 뱀이 지렁이 보고 ‘왜 인사 안 하노’ 하면서 뭐라 하니까 지렁이가 ‘같이 배 깔고 기어댕기는 처지에 무슨 인사?’ 그랬지. 그러니까 뱀이 지렁이를 칵 물고는 절벽에 가서 던져 떨어뜨려버리거든. 그때 지렁이가 떨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 하면서 아무 말 없이 그냥 떨어져. 그게 끝이야. 그런데 그편이 출간된 거 보고는,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공보부 직원이 편집부에 와서 ‘이거 무슨 의미냐’며 따지더래. 알고 보니 박통이 뱀띠라던데, 난 그 사람이 뱀띠인지 어떤지도 몰랐거든. 편집부에서 ‘아이고 이 사람(박 화백)은 정치의 정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면서 말리고 해서 겨우 남산(중앙정보부)에는 안 끌려가고 끝났지. 길창덕 화백이 신문에 시사만화 그리다가 진짜로 남산 끌려가 더러운 꼴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래서 사람이 싫어진 건가. 이후로는 <고인돌>은 꾸준히 그렸지만 오랫동안 대학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대학에서도 뭘 가르치기보다는 학생들이랑 장난하며 놀았던 게 전부다(웃음). 뭘 가르치고 할 사람이 아니거든. 대신 잔소리 딱 하나 한 게 일주일에 한권씩 책 읽으라는 얘기였다. 1주에 1권이면 1년에 50권, 4년 뒤 졸업하면 200권 되잖아. 그거면 된다고. 요즘 웹툰이 인기 있고 잘 나가는데 사실 난 잘 모르니 해줄 말도 없다. 생각해보면 내가 40대 시절 샘터에서 발행하는 ‘엄마랑 아기랑’에 만화 실을 때 샘터 발행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이게 무슨 얘기지?’ 하며 이해를 못 했다고. 세대 차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동네 동물들한테나 택배 갖다주며 지내지(웃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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