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서 남편 살해범이 많았던 이유
요즘은 우리 바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선이 됐지만 한때 명태(明太)는 동해 바다에서 많이 잡혔고 한국인들이 가장 즐기는 생선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워낙 많이 먹다 보니 명태라는 이름이 외국에도 전해졌지. 러시아 사람들은 ‘민타이’라고 부르고 일본인들은 명란젓을 명태자(明太子)로 일컫는다고 하는구나. 일설에 따르면 명태는 함경북도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처음 잡아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고 해.
1924년 이 명태의 고장 함경북도 명천에서 식민지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벌어진다. 김정필 여인의 남편 독살 사건. 당시 언론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정필은 금년 4월에 지명동에 사는 김호철에게 시집을 갔는데 (···) 항상 자기 남편 김호철이 얼굴이 곱지 못하고 무식하며 성질이 우둔한 것을 크게 비관하여 일종의 번민을 느껴 오던 중 남편을 없애고 다른 이상적 남편과 살아보려고 주야로 생각했다. 금년 5월9일 우연히 동리 청년들의 이야기하는 소리 중에 랏도링이라는 쥐 잡는 약이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는 독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서운 생각을 품고 이튿날 동리 사람을 시켜 그 약을 사두었다. 23일 주먹밥과 엿에 그 랏도링을 섞어놓고 남편을 정답게 불러 가지고 하는 말이 ‘그대가 항상 앓고 있는 위병과 임질을 고치려면 이 약을 먹으라. 이 약은 나의 오촌이 먹고 신기하게 나은 것이니 안심하고 먹어도 좋은 것이라’ 하여 주먹밥을 먹였는데 그것을 먹은 남편이 구역질을 하며 토하자 다시 엿을 먹으라 하여 그 엿까지 먹여 드디어 금년 5월30일에 사망케 하였다(〈동아일보〉 1924년 7월17일).”
요약하면 김정필이라는 여자가 시집 온 지 한 달 만에 남편이 못생기고 무식하고 우둔한 것에 앙심을 품고 남편에게 쥐약을 먹여 독살했다는 것이지. 그런데 이 기사의 제목이 좀 야릇하다. “본부(本夫) 독살 미인(美人), 사형 불복”이었거든. ‘남편 독살 혐의자’라든가 ‘독살 혐의 피고인’이 아니라 ‘독살 미인’이다. 김정필은 함경북도 청진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항소해 서울 경성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됐는데 그를 소개하면서 ‘독살 미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으니 당시 김정필 여인의 외모가 대단한 화제였음을 짐작할 만하지.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스케치한 기사의 제목은 한층 더 자극적이다. “법정에 입(立)한 절세미인.” 방청석은 개정하기 전부터 입추의 여지조차 없었다고 해. ‘절세미인’ 독살범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몰려왔기 때문이야. 재판장은 범죄 사실을 물었지만 김정필은 “초췌한 얼굴과 똑똑한 말소리로 범죄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재판장이 조서와 1심의 기록을 들어 범죄 사실을 자백한 것에 대해 캐묻자 “경찰서에서 순사가 때리면서 없는 일이라도 그렇게 말하라고 하길래 그리 말한 것”이라고 대답했지.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일반 방청객은 통역관의 통역이 시원치 못한 것과 피고의 가정의 내용은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피고에게 불리한 피고의 시부모 측 인물만 증인일 뿐이라고 매우 피고 김정필에게 동정하는 말이 많았는데 과연 천하에 용서하지 못할 죄인인지 어떠한지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이더라(〈동아일보〉 1924년 8월16일).”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기자는 다분히 김정필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어. ‘초췌한 얼굴과 똑똑한 말소리’ ‘시원치 못한 통역’ ‘자세한 조사 없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인만 들이댄다는 일반 방청객의 불만’을 여과 없이 전달하고 있을뿐더러 ‘천하에 용서치 못할 죄인지 어떠한지’ 주목해보자는 식으로 말하고 있잖니.
1924년 10월20일자 〈동아일보〉의 ‘여사형수와 방청자’라는 제목의 기사는 아예 이렇게 시작된다. “경성의 밤은 밝다. 그러나 저 여성(彼女)의 앞길은 캄캄하다. 희망의 빛이 이미 사라졌느냐. 아직 켜지지를 아니하였나? 눈물의 홍수는 흐르고 흘러 끝없는 바다에로 들어가라 한다.” 무슨 신파극 대본을 보는 느낌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대화도 재미있다. “그 여자는 세상에 난 보람이 있네.” “(세상에) 난 보람인지 죽는 보람일지 누가 알아.” “명천 구석 조그만 촌색시가 이렇게 장안을 뒤집어놓다시피 했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웬간하오.” 여론은 그렇게 김정필에게 동정적이었다. 위 기사에서 〈동아일보〉 기자는 노골적으로 감상을 토로하고 있어. “피고의 친척 비슷한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아니한 일은 나로 하여금 극도의 불쾌를 느끼게 했다. 즉 피고는 친부모에게마저 빈척(擯斥·내쳐진)된 자였다. 어찌 저런 인생이 되었나 적잖은 동정이 생겼다.”
김정필의 범행이 사실인가 아닌가보다는 그 미모를 내세운 값싼 호기심이 앞섰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정필에 대한 동정론이 온전히 그 미모 때문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정필은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갔고, 독살범으로 지목됐을 때 도와줄 가족 하나 없었던 불우한 사람이었으니까. 억지 결혼 후 남편과 불화하며 시댁과 갈등을 겪는 여성들은 조선 방방곡곡에 셀 수 없이 많았다. 피눈물을 삼키며 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불행한 폭발로 이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지.
가정이라는 구금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의사 구도 다케키는 “타국에서는 여성 살인범 비율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반면, 조선에서는 남자 100에 여자 88을 나타내 일본 여성의 9배에 이르는데 살해 대상이 바로 그녀들의 남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 구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자 살인범 106명 중 66명이 남편 살해범이었어(〈식민지 시기 ‘의학’ ‘지식’과 조선의 ‘전통’〉 홍양희). 김정필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으되 김정필과 비슷한 상황에서 칼을 휘두르거나 극약을 음식에 넣었던 여성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지.
1933년 ‘본부(本夫) 살해에 대한 사회적 고찰’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기사에서 김정실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륜의 철칙을 삼다시피 한 유교 도덕에 지배돼 내려오기 무릇 몇천 년인가. 여성은 가정이라는 구금 생활을 반복하는 동안 활동할 힘을 잃고 (···) 해골 같은 존재가 돼 남성의 욕망에 제공된 일개의 장난감같이 하늘이 부여한 여성의 능력을 발휘할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최후의 발작이 자기 생명과 저울질하여 판단될 때에 나타나, 백년을 해로할 남편이지만 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던 것입니다. (···) 그들이 이 무서운 범죄를 행하게 되었다는 데 대하여 사회는 모름지기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죄악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김정필은 끝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옥중에서도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 됐다. ‘옥중화(獄中花)’니 ‘옥중 미인’이니 하면서 그녀의 수형 생활까지 보도됐지. 모범수로 선정돼 연이은 감형을 받은 그녀는 1935년 가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형무소 안에서 화복(和服·일본옷) 짓는 법을 배워서 그 바느질 솜씨로 일등을 먹었고 작업 상여금으로 269원을 받은(〈조선일보〉 1935년 4월21일)” 김정필의 이후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녀의 범죄 사실을 엄정히 평가하기보다 ‘미모’에 쏠려버린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외모 지상주의’의 발호인 것 같아 입맛도 쓰지. 하지만 김정필의 미모가 아니라 김정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무수하게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책임은 오롯이 그들에게만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동아일보〉 김정실 기자의 당부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는구나.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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