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자위남, 피해자는 매일 악몽을 꾼다

김정엽 기자 2021. 5. 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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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블랙박스]

“출퇴근 버스 타기가 두려워 휴직했습니다.”

부산에 사는 20대 여성 A씨는 지난 1월 23일 고속버스를 탄 뒤로 매일같이 악몽을 꾼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지러워 중간에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A씨는 이날 전북 전주행 고속버스에 탔는데, 바로 옆 자리에 탄 30대 남성 B씨가 갑자기 바지 지퍼를 내리고 신체 주요 부위를 꺼냈다. B씨는 3시간 30분 동안 A씨 옆에서 변태 행각을 이어갔다.

A씨는 이날 이후 “옆자리에 남자가 앉기만 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힌다”며 “택시를 타고 다니거나 남자친구 차를 이용해 출퇴근하다 이번 달부터 장기 휴직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어 “예민한 상태로 다니다 보니 몸이 안 좋아져서 입사 이후 처음으로 병가를 냈다”며 “지금도 그날 기억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

◇악몽 같은 3시간 30분

지난달 1월 23일 부산에 사는 여성 A씨는 전북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A씨 바로 옆자리에 탄 30대 남성 B씨가 음란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A씨 제공

A씨는 지난 1월 23일 전주행 고속버스에 탑승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아 바로 옆 자리에 B씨가 탔다. 곧 버스가 출발했고 믿지 못할 장면이 펼쳐졌다. B씨가 갑자기 바지 지퍼를 내리고 신체 중요 부위를 노출한 것이다. A씨는 너무 놀랐지만 대응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눈을 꼭 감고 잠자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 기사나 승객들에게 알려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했지만, B씨로부터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아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A씨는 가슴을 졸이며 고속버스가 휴게소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처럼 자리를 벗어나 자연스럽게 좌석을 바꿔 앉을 생각이었다. A씨는 휴게소에 버스가 도착하자 서둘러 내렸다. 주변에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자신을 지켜보는 B씨 시선이 두려웠다. 다시 버스에 오르면서 다른 자리를 찾아봤지만 이미 만석이었고, 어쩔 수 없이 B씨 옆자리로 돌아왔다. 버스가 휴게소를 출발하자 B씨는 다시 신체 중요 부위 노출을 계속했다.

A씨는 용기를 냈다. A씨는 자신의 휴대전화 메시지 창에 ‘옆에 탄 남성이 음란행위를 한다. 직접 찍으려니 겁이 난다. 대신 촬영을 해달라’는 내용을 적어 뒷좌석 승객에게 슬쩍 전달했다. 혹시 B씨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했지만, 우선 증거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뒷좌석 승객은 B씨 음란 행위를 촬영해 A씨 휴대전화로 전달했다. A씨는 옆좌석 B씨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경찰에 문자메시지로 신고했다. A씨가 신고를 하는 동안에도 B씨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음란 행위를 이어갔다. A씨 신고를 받고 미리 출동해 있던 경찰은 B씨를 범행 3시간 30분 만에 현장에서 검거했다.

◇”성추행 아닌 공연음란이라니”

B씨에 대한 사건결정결과 통지서./독자제공

A씨는 B씨가 강력한 처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경찰은 B씨에게 ‘공연음란’ 혐의만 적용해 지난 2월 3일 검찰에 송치했다. 전주지검은 지난달 사건을 부산지검 서부지청으로 넘겼고, 서부지청은 최근 B씨에 대해 공연음란 혐의만 적용해 약식기소했다. 검찰은 A씨 사건에서 강제 추행을 인정할 만한 사정을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지난 14일 본지와 통화에서 “B씨 범행은 단순 공연음란죄가 아니라 옆자리의 여성 승객을 겨냥한 강제추행으로 처벌해야 한다”며 “증거 동영상을 보면 B씨는 자신의 옷으로 한쪽은 가린 채 온전히 나를 향해 신체를 노출했다”고 주장했다.

A 씨는 또 “최근 사례만 봐도 20대 남성이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던 여고생 뒤로 다가가 음란 행위를 했는데, 이 남성은 강제추행죄로 처벌받았다”며 “이 사건에서도 20대 남성은 여고생을 건드리지 않고 음란 행위만 했다”고 말했다.

B씨가 약식기소되자 A씨는 정식 재판을 열어달라고 재판부에 탄원서를 낼 예정이다. A씨는 “이런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재판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B씨가 합의를 하지도 않았고, 정식 재판을 통해 다시 강제추행 혐의가 적용될 수 있도록 관련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접촉 없어도 성추행 인정하는 추세”

A씨와 비슷한 사건에서 법원 판결은 엇갈리고 있다. 지난 2013년 창원지법 형사4부(이완희 부장판사)는 시내버스 맨 뒷좌석 창가에 혼자 앉아 있던 여고생에게 다가가 자위행위를 한 혐의(강제추행·공연음란)로 기소된 C씨에게 공연음란죄만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신체 접촉이 없었던 점, 버스 운전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자위행위를 피할 수 있었던 점, 공중에 공개된 버스 안에서 행위가 벌어진 점 등을 종합하면 단순히 피고인이 자위행위를 하는 모습을 여고생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침해당했다고 보기 어려워 강제 추행은 무죄”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성폭행 범죄 일러스트.

반면 협박이나 폭력 등 신체 접촉이 없더라도 강제 추행을 인정한 판결도 있다. 지난 2019년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1부(김복형 부장판사)는 강제 추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D(28)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D씨는 지난 2018년 3월 14일 오후 10시 55분쯤 춘천시 한 버스 정류장 벤치에 혼자 앉아 있던 여고생(17)에게 다가가 1.5m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신체 중요 부위를 꺼내 음란 행위를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의도적으로 피해자를 향해서 음란 행위 등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없었고, 공개된 장소지만 피해자의 뒤에서 몰래 이뤄진 점으로 볼 때 강제 추행을 유죄로 인정한 원심은 적법하다”고 밝혔다.

최근엔 피해자 바로 앞에서 협박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강제 추행을 인정하는 추세다. 전주지법은 카카오 톡 채팅방에서 만난 미성년 피해자를 협박해 성 착취 물을 전송받은 혐의(강제추행)를 받는 E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E씨는 피해자와 카카오 톡 채팅방을 통해서만 대화를 나눴고, 직접 만나 물리적으로 협박과 폭력은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북 전주에서 활동하는 김기태 형사전문 변호사는 “사이버 성범죄의 경우 물리적 협박이나 폭행을 하지 않았더라도 강제 추행을 인정하는 추세”라며 “A씨의 경우 물리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더라고 B씨 행위 자체를 유형력의 행사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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