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낙화암보다 비극적인 발리의 '푸푸탄' 항거

한겨레 2021. 5. 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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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랜선 동남아][토요판] 랜선 동남아
⑭ 발리의 과거와 현재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발리
20C초 네덜란드 침략에 항거
왕족·귀족, 주민 1천명이 자결
인도네시아인의 저항정신 상징
네덜란드 지배후 관광지 개발
1960년대 대중적 여행지 돼
해안가 포진한 휴양시설 외에
전통·예술 간직한 '우붓' 유명
하늘에서 내려다본 발리섬의 화산. 정정훈 제공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에세이에는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유를 만들고, 동기를 개발하고, 그리고 떠나려고 노력한다. 평상시에도 그럴진대 자가격리와 집합금지가 일상화된 2021년 현재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을 꿈꾸고 있을까?

코로나19가 본격화하기 이전인 2019년 통계(한-아세안센터 ‘2019 통계집’)를 보면 동남아시아를 찾은 한국 관광객이 1천만명을 돌파했다. 이 중 절반에 육박하는 430만명이 베트남을 방문했고, 인도네시아 여행객은 40만명에 달했다. 저비용 항공사가 취항하지 않아 항공편이 많지 않고, 베트남보다 여행비용도 비싼데다가 여행지가 대중적이지 않아서 아직은 한국인들의 인도네시아 방문이 적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대륙에 걸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다양한 종족의 전통문화, 열대우림 기후와 다채로운 자연 풍경 등을 지닌 매력적인 여행지다.

인도네시아에는 수도인 자카르타, 제2의 도시인 수라바야, 자바인의 마음의 고향 족자카르타(욕야카르타), 자바의 파리로 불린 반둥 등 다양한 매력의 도시가 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여행지는 발리섬이다. 발리는 제주도의 약 3배 크기에 430만명이 거주하는 큰 섬이다. 인구수로는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해도 서구의 한 조사에선 인도네시아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전세계인에게 잘 알려진 지역이다. 짐작건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도 발리섬은 여행의 시작이거나 최종 목적지였을 것이다.

코로나19라는 길고 어두운 이 터널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여행을 자유롭게 떠나는 날이 돌아오면 발리섬은 다시 관광객으로 붐빌 것이다. 억눌렸던 소비가 분출되는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리를 찾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아마도 발리섬은 새로운 여행객을 맞이하기 위해 천혜의 자연환경을 스스로 복원할 것이다.

발리섬 우붓 지역의 계단식 논. 픽사베이

1920년대 정규 증기선 운항

발리 문화의 기원은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400년간 지배했던 마자파힛 왕국의 유산으로 본다. 왕위 계승 문제로 15세기 후반 왕국의 신하, 승려, 공예가들이 발리섬으로 이주한다. 결국 마자파힛 왕국의 문화적 전통에 기인한 문학과 음악, 조각 등은 현재까지 발리 지역의 고유한 전통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발리 지역을 마자파힛의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발리섬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세기 전후 제국주의 시대 도래와 함께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전 지역에 대한 식민화를 추진하면서부터였다. 발리인은 네덜란드의 식민화 과정에 극렬하게 저항했다. 당시 식민지 군대는 1906년 사누르 해안 지역에서 바둥 왕가의 군대와 전투를 치렀다. 소규모 전투에 연이어 패배했던 바둥 왕가의 왕족과 귀족, 발리 주민들은 네덜란드군에 대항하기 위해 1908년 마지막 항전에 나섰다. 결사항전의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숨을 끊는 ‘푸푸탄’(Puputan)이었다.

행진의 선두에 있던 왕은 가마에서 내렸고, 사제는 왕의 뜻에 따라 비수를 왕의 가슴에 꽂았다. 일부 귀족과 주민도 왕을 따라 자결을 택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들은 보석과 금화를 네덜란드 군대에 던짐으로써 그들을 조롱했다. 네덜란드 군은 소총과 포탄을 발사하였고, 발리인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와 전투가 있었던 1906~1908년 사이에 약 1000여명의 발리인이 자결하였고, 이는 네덜란드 식민 당국의 야만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 푸푸탄은 발리인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식민주의에의 저항을 상징하는 국가유산이자, 글자 그대로 과거 질서의 ‘명예로운 죽음’을 의미한다.

네덜란드의 식민화에 저항해 발리의 바둥 왕가의 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 주민들은 1906년 집단으로 목숨을 끊는 ‘푸푸탄’을 거행했다. 인도네시아는 이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기리고 있다. 정정훈 제공, 발리 박물관 소장
1906년의 푸푸탄을 기리는 동상이 발리의 수도인 덴파사르에 서 있다. 위키피디아

최후의 저항 끝에 발리섬 전역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됐으며, 발리섬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군도 관광은 1908년부터 시작되었다.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자카르타)에 ‘공식적인 관광 기구’가 설치되고, 발리섬은 “소순다 열도의 보석”으로 관광객들에게 소개되었다. 하지만 발리 관광은 유럽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섬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발리섬이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 네덜란드 회사가 정규 증기선을 운항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로열패킷회사(Koninklijke Paketvaart-Maatschappij, KPM)는 바타비아, 마카사르, 수라바야, 발리섬을 연결하는 항로를 개설했다. 이 항로를 통해 소, 돼지, 쌀, 코코넛, 커피 등 농축산물이 운반되고, 선박의 일정 공간을 할애해 관광객들을 태웠다. 항로의 중간 기착지인 서부 자바, 북부 수마트라, 남술라웨시, 발리에 관한 관광책자가 당시 발행됐다. 이에 따라 매년 3만명이라는 적지 않은 관광객이 발리에 갔다.

식민지 물품을 수송한 네덜란드 증기선. 정정훈 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소장

‘관광 발리’의 성공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상과 연관이 깊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서구인들이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됨에 따라 과거에 대한 복고적인 향수를 채워줄 ‘진짜’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발리섬과 같이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는 ‘에덴 동산’이나 ‘진짜’라는 이미지가 투영됐다. 20세기 초 ‘관광 발리’는 때묻지 않은 인류의 이상향으로 서구인에게 소비된 셈이다.

1958년 영화 ‘남태평양’의 힘

최근 들어 발리 여행의 목적이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한국인에게 발리섬은 여전히 멋진 신혼여행지로 남아 있다. 한국인 신혼여행객은 대부분 4박6일 일정으로 발리를 다녀가고, 그들은 바다와 인접한 고급 숙소에서 발리를 경험한다. ‘풀빌라’라는 명칭으로 판매되는 고급 숙소는 담이 둘러진 채 정원, 수영장, 방이 하나의 구역에 펼쳐져 있다. 휴양을 원하는 여행객에게 최고의 호사를 제공한다.

그러나 해안가 휴양시설에 머무는 여행객들이 실제 발리인의 일상을 경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행사들은 여행의 마지막 날에 ‘예술인 마을’로 불리는 우붓을 일정에 포함시킨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선선하고 해안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우붓은 발리 여행객에게 또 다른 새로움을 안겨준다. 2010년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의 주요 배경이 된 곳도 우붓이다.

우붓 왕족의 장례식. 장례식 모습도 발리의 문화상품 중 하나다. 정정훈 제공
문화관광지로 유명한 발리섬 우붓 지역의 한 마을. 정정훈 제공

우붓 지역이 관광지로 변모한 것은 대략 1920년대였다. 우붓 왕족의 초청으로 서구의 예술인들이 이 지역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당시 발리 고전 양식의 회화와 서양화 양식이 교류하면서 ‘우붓 양식’과 ‘바투안 양식’이 새롭게 정립된다. 힉먼 파월과 마거릿 미드, 그레고어 크라우제, 발터 슈피스와 같은 예술인과 학자들의 책, 그림, 사진 등이 발리의 자연환경과 문화예술을 서구에 소개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 시기 발리섬의 문화예술에는 당시 서구인의 열망과 환상, 동양적인 행복의 이미지가 함께 투영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과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 시기에 발리섬 관광은 침체기를 겪었다.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이 끝나고 정치사회적인 안정을 찾은 1950년대에 들어서야 발리섬 관광이 재개됐다. 1958년에 나온 미국 영화 <남태평양>(In South Pacific)은 발리 여행붐을 다시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뮤지컬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의 주제곡인 ‘발리 하이’(Bali Ha’i)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발리는 서구인들에게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섬으로서 각인됐다.

“발리 하이는 당신을 불러요. 밤이나 낮이나, 당신의 마음속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겠지요. ‘어서 오십시오’라고. 발리 하이는 바닷바람을 타고 속삭여요. ‘여기예요. 당신의 특별한 섬입니다. 당신의 특별한 소망과 꿈이 언덕에 꽃피고, 흐름에 빛납니다. 나를 청하신다면,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나는 있습니다.”

‘발리 하이’ 가사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내용은 발리섬을 남국의 평화로운 휴양지로 묘사함으로써 전쟁으로 잊힌 이 지역에 대한 여행객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과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 이후 침체를 거듭하던 발리섬 관광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발리 주민들의 오토바이가 관광차에 막혀 있다. 정정훈 제공

대중관광의 대안 ‘문화관광’

여기에 더해 발리는 1960년대 후반 수하르토 정부 시기에 인도네시아 ‘경제성장 5개년 계획’에 포함되면서 대중 관광지로 변모하게 된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발리주 발전 종합계획을 ‘관광’으로 표명한 뒤 누사두아 리조트 단지 등 관광시설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의 차관을 이용해 건설했다. 이 시기에 ‘점보 747 제트여객기’ 등 대형 항공기가 개발되고, 발리국제공항이 완성됨에 따라 관광객들이 발리섬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관광객의 비약적인 증가는 여러 부작용을 초래했다. 해안가의 무분별한 개발, 상수도 등 물 부족, 전통문화 훼손 등은 지속가능한 관광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발리인들의 종교인 힌두교가 추구하는 ‘사회적 조화’가 위협받기에 이르러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이에 1971년 발리 주정부는 ‘발리 관광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대중관광의 대안으로 ‘문화관광’(pariwisata budaya)을 제시하였다. 여행객에게 발리의 문화적 전통에서 비롯한 다양한 관광 상품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발리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존중해주길 바란 것이다. ‘문화관광’ 정책의 핵심 지역으로 내세운 곳 중 하나가 바로 우붓이다.

정정훈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최근 들어 우붓 지역은 발리 힌두교와 사상적 흐름을 공유하는 요가, 명상 그리고 유기농 식품의 생산과 소비지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100년에 가까운 발리 관광의 역사는 역동적이었고, 무엇보다 발리인 스스로가 서구 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화관광 정책에도 시사점을 준다.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정정훈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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