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스톡] "지금 구리 무시하는 겁니까" 정재영의 혜안

2021. 5. 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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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여러분의 주식 계좌는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25년 연예 전문기자 김범석씨가 좌충우돌하며 겪은 스타들의 이야기와 가치투자 도전기를 전해드립니다.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2015년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정재영은 "배우 일이 잘 안 되면 스위스로 가려 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내 얼굴을 좋아하나 보다"라며 웃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기파 배우 정재영은 사석에서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네, 글쎄요, 아니요"만 반복하며 기자를 자괴감에 빠뜨리는 단답형 배우들이 많은데 그는 달랐다. 뭘 물어도 거침없이 특유의 너스레까지 덧붙이며 설명해줘 인기가 매우 좋았다. 기사를 쓸 때도 항상 취재 분량이 넘쳐 뭘 빼야 할지가 고민일 정도였다.

탁재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드립이 좋았고 무엇보다 웃음의 혈자리를 정확히 공략할 줄 아는 개그감이 뛰어났다. 사자성어도 훤하고 역사, 고전에도 밝았다.

아마 사극 경험과 평소 상당한 독서량 덕분일 것이다. "어디 사세요?"라고 물었을 때도 그랬다. 그는 거침없이 "구리요"라고 말한 뒤 "근데 왜 웃어요? 청담동이나 평창동이 아니라서 그래요? 지금 경기도 구리 무시하는 거죠?"라며 기자를 몰아붙였던 기억이 난다.

가끔 무슨 종목 주식을 갖고 있냐는 질문에 '구리'를 말하면 상대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거나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어감상 '구리다'가 연상돼서일까. 조크로 치부하거나 좀 그럴듯한 종목을 기대했는데 그게 뭐냐는 투의 실망 섞인 반응이었다.

제련공장에서 구리를 주조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실제 구리에 투자하고 있던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리액션이 거의 비슷해 내심 흥미로웠다. 속으로 '음, 여전히 원자재 쪽의 관심과 휴먼 인덱스가 낮구나'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2021년 5월 기준 구리에 투자한 결과는 1승 1패다.

2013년 은행 다니는 후배를 만났는데 당시 원자재 펀드가 인기라는 얘기를 듣고 그날 밤부터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원자재 투자에 문외한이던 필자는 기껏해야 금, 은밖에 몰랐는데 클릭할수록 이 영역의 폭넓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구리를 사서 대여 금고 같은 곳에 보관하는 어설픈 상상을 했을 만큼 이 분야에 무지했다. 구리의 최대 생산국이 칠레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

게티이미지사진

그러나 증권사가 어떤 곳인가. 이미 증권사마다 원자재에 투자하는 다양한 상품이 개발돼 있었고 소비자는 그중 마음에 드는 펀드를 고르기만 하면 됐다. 금과 은, 원유뿐만 아니라 구리, 납, 아연, 니켈, 주석, 옥수수, 대두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당시 증권사 직원이 추천한 구리 관련 펀드에 호기롭게 1,000만 원을 넣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계좌를 열어봤다. 처음엔 좀 오르는 것 같았지만 아뿔싸. 펀드 잔고는 두 달 만에 마이너스(-) 10%를 넘어서며 곤두박질했다.

그때는 전혀 몰랐다. 구리가 원유보다 세계 경제와 그렇게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한마디로 구리는 경제가 침체 국면이면 폭락, 바닥을 찍고 호전되면 오르는 원자재의 대표 주자였다.

2013년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미국 셰일가스가 호기롭게 맞짱 뜨며 에너지 패권 싸움을 벌이던 때다. 대표적 산업용 비철금속인 구리 역시 먹구름 가득한 세계경기 침체 우려 탓에 비인기 종목이 되고 있었다. 주식으로 치면 상투를 잡고 비자발적 장기 투자자가 된 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13년은 전 세계 구리의 40%를 소비하는 중국의 경제성장률까지 꺾이며 구리 가격이 제대로 직격탄을 맞았다.

열과 전기를 모두 전도하는 구리는 각종 배선과 모터 같은 전기 장비에 필수 재료인데 경기가 가라앉으면 공장이 돌지 않고 수요가 줄어 가격이 추풍낙엽 신세가 된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배웠다.

당시 불안한 마음에 세계 3위 채굴 업체인 글렌코어 주가를 확인하려고 새벽에 일어나 영국 런던증권거래소 사이트를 들락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뒷목이 뻐근해진다.

결국 펀드에 들어갔을 때 톤당 8,200달러이던 구리 가격은 3년 뒤인 2016년 초 4,300달러까지 떨어지며 반토막이 됐고, 증권사 직원의 권유(?)로 마이너스 40% 손실을 확정하며 되팔아야 했다.

펀드 판매 수수료를 챙기고 헤지 상품으로 손실을 만회했을 증권사가 야속했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공부하지 않고 모든 투자 결정을 창구 직원에게 맡긴 필자의 아둔함 때문이었고 패잔병처럼 증권사를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다. 명심하자. 창구에서 방긋방긋 웃는 증권사 직원은 고객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회사로부터 좋은 인사 고과와 인센티브를 받는 게 목적일 뿐 고객의 돈을 불려주는 데 1도 관심 없는 이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헤어진 첫사랑처럼 그렇게 잊고 지내던 구리를 다시 만난 건 팬데믹이 선언된 지난해 3월.

코스피 지수가 1,400까지 추락하고 조만간 1,000이 깨질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득세하던 때 염가 세일 중이던 국내 주식과 함께 '맞아, 구리가 있었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기축 통화국의 역대급 유동성 공급과 파격적 위기 대응 정책에 힘입어 딱 일 년만 버티면 모든 산불이 완벽하게 진압될 거라는 확도 있었다. 머잖아 경기 회복 사인이 하나둘 켜지면 구리 관련 상품이 가장 먼저 뛸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장고는 악수를 부를 뿐 길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지난해 3월부터 다달이 미국 구리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와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구리 실물 ETF를 분할 매수하기 시작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W자 반등을 생각했지만, 예측을 비웃듯 주가는 역대급 V자 반등을 보였던 거다.

지난해 3월 이후 꾸준히 우상향한 국제 구리 가격은 5월 현재 톤당 1만 달러를 넘기며 10년 전 역대 가격을 추월했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 활성화 계획과 중국의 소비 진작 등이 가세하며 구리 수요가 급등한 것이다.

여기에 전기차 호재도 한몫했다. 내연차 한 대당 약 20kg의 구리가 들어간다는데 전기차에는 그보다 3, 4배의 구리가 필요하다는 분석과 전망이 매수세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평균 매입가 6,000원대였던 TIGER 구리 실물 ETF의 경우 1만 원대부터 나눠 팔았으니 70% 넘는 수익률을 기록한 셈이다.

구리는 최대 소비국 중국과 세계 경제 성장의 바로미터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 직후 경제 재건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학교와 도로, 공항, 교량, 터널 등을 짓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런 인프라 산업에 들어가는 기초 재료가 바로 시멘트와 구리다.

게다가 구리는 반도체 칩에도 없어선 안 되는 원자재 중 하다. 국내 주식 중 구리 관련주로 통하는 풍산과 가온전선(LS전선 자회사)을 비롯해 이구산업, 대창은 하나같이 팬데믹 이후 1년 만에 주가가 무려 2~4배 올랐다.

필자에게 5년 전 큰 낙담을 안긴 구리는 그때의 아픔을 잊지 않고 다시 기억해준 선물로 흡족한 수익률을 안겨줬다. 배우 정재영의 말처럼 우리는 구리를 무시해선 안 된다.

김범석 전 일간스포츠 연예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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