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외면받은 《저스티스 리그》, 잭 스나이더 작품으로 재평가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1. 5. 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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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바꾼 '감독판', 열 영화 안 부럽다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세계 최대 영화 사이트 IMDB에 《저스티스 리그》(2017) 감독은 잭 스나이더로 표기돼 있다. 국내 영화 관련 사이트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팬은 많지 않다. 또 다른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스나이더가 《저스티스 리그》의 첫 삽을 떠서 이끌어간 건 맞다. 그러나 딸 오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절망한 스나이더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진 하차하면서 《저스티스 리그》의 공은 조스 웨던에게 넘어갔다. 마블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았던 《어벤져스》의 조스 웨던이 DC의 영웅들을 규합하는 임무도 맡게 된 셈이다.

그래서 구원투수 조스 웨던의 성적은 어땠나. 새로 부임한 조스 웨던은 각본을 고치고, 음악감독을 교체하고, 70% 이상을 재촬영하고, 러닝타임을 2시간으로 대폭 줄이는 재편집을 감행했다(그러니 이 영화가 어찌 스나이더 작품이겠는가). 그렇게 완성된 《저스티스 리그》는 기존 DC 영화들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높아진 유머 구사 빈도였다. 예상하겠지만, 조스 웨던의 영향이다. 그러니까 DC 영화에서 마블의 향기가 난 것인데, 결과적으로 《저스티스 리그》는 마블도 DC도 아닌 모호한 결과물이 돼 버렸다. 팬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 《잭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스틸컷ⓒ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팬들의 요청에 4년 만에 응답

뿔난 팬들은 온라인 청원 사이트를 개설해 스나이더판 《저스티스 리그》의 공개를 촉구했다. 마침 극장판에 빠진 잭 스나이더의 촬영 이미지가 내부 관계자에 의해 대거 노출되면서 논란에 불을 붙였다. "이걸 왜 잘랐어!!!" 팬들은 워너브러더스와 조스 웨던이 프로젝트를 망쳤다고 비난했다. 여기까지가 2017년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지난 3월 워너브러더스가 팬들의 요청에 4년 만에 응답했다. 자사 OTT 플랫폼 HBO맥스를 통해 잭 스나이더의 감독판인 《잭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를 공개한 것이다. 《저스티스 리그》의 혹독한 실패가 스나이더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준 셈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나이더는 출연했던 배우들을 다시 규합해 재촬영을 하고, 기존에 자신이 찍었지만 버려진 컷들을 이어 붙여 원래 만들고 싶었던 버전을 무려 4시간짜리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팬들 사이에서 '이건 완전 새로운 영화'라는 탄성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반응은 호의적이다. DC 특유의 분위기로 영화는 회귀했고, 엉성하다고 평가받던 인물들이 서사를 조금 더 부여받아 입체감을 입었다. '이 영화를 딸 오텀에게 헌정한다'는 엔딩크레딧 문구는 이 영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말 같아 괜히 먹먹해지기도 한다.

감독판으로 재평가받는 사례들

감독판을 통해 영화가 재평가받은 경우가 처음은 아니다. 극장판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던 또 다른 작품은 2005년 개봉한 《킹덤 오브 헤븐》이다. 《글래디에이터》(2000)의 성공으로 한껏 고무된 리들리 스콧이 다시 도전한 시대극이었던 《킹덤 오브 헤븐》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크게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3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 분량이 문제가 됐다. 스튜디오 입장에선 극장에 영화를 여러 번 걸어야 이득인데, 그러기엔 3시간 넘는 영화는 상영 회차 확보가 불리했다. 20세기폭스는 이에 대한 해결 방법을 요구했고, 리들리 스콧은 190분 길이로 완성한 《킹덤 오브 헤븐》을 140분 분량으로 잘라 극장에 내걸었다.

결과는? 영화의 4분의 1이나 자르는 무리한 편집을 감행했으니 탈이 안 나는 게 이상한 일. 영화는 결국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리들리 스콧의 실패로 기록될 뻔한 영화는 그러나 감독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면서 기사회생했고, 재평가를 받았다. 사실, 리들리 스콧은 이 방면에서 잔뼈가 굵다. 《블레이드 러너》(1982)의 감독판을 선보이며 영화 가치를 상승시킨 경험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극장판 개봉 당시 리들리 스콧은 제작사 압박에 못 이겨 주인공 내레이션을 첨부하고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꾼 바 있다. 영화는 매몰찬 혹평과 함께 졸작 취급을 당했지만, 소수의 마니아를 통해 지지받았고 감독이 원래 원했던 버전이 공개되면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설국열차》는 그런 의미에서 조금 독특하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 북미 배급을 맡은 '와인스타인 컴퍼니'와 북미판 상영 버전을 두고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인 바 있다. '가위손'으로 통하는 하비 와인스타인이 《설국열차》 분량을 20여 분 잘라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이 이슈는 미국 청원 사이트인 'Change.org'에서 'FREE SNOWPIERCER!(설국열차에게 자유를!)'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청원이 진행될 정도로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버전을 지켜내기 위해 결국 소규모 개봉을 선택했는데, 신념을 꺾었다면 《설국열차》에 대한 북미 평가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 스틸컷ⓒ쇼박스 제공

팬 서비스 마케팅의 일환

감독판을 통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뒤집힌 경우가 국내에는 그다지 많지 않다. 팬 서비스나 국제영화제 출품, DVD 출시를 목적으로 감독판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영화 재관람을 유도하고 이슈를 만드는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감독판이 많이 등장하는 추세다. 한두 장면 추가하고 '감독판'이란 이름으로 재개봉하는 영화가 우후죽순 나오면서 흥행을 노린 꼼수라는 쓴소리가 나왔지만, 그 와중에 인상 깊은 행보를 보인 작품도 있었다. 《내부자들》이 그렇다. 130분 분량으로 개봉해 707만 명을 모은 영화는 무려 50분이나 추가한 3시간짜리 감독판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을 공개하며 208만 관객을 추가로 동원했다. 감독판 개봉의 성공 사례로 남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국내엔 '검열판'이라는 게 있었다. 감독이 원하는 버전이 국가에 의해 마구잡이로 가위질당하던 시절에 나온 말이다.

이처럼 감독판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팬덤의 강력한 요구로 인해. 러닝타임 제약으로 덜어냈던 장면을 복원하기 위해, 제작사나 스튜디오의 요구로 만신창이가 됐던 편집본을 되돌리기 위해. 혹은 낮은 등급을 받기 위해 삭제했던 자극적인 장면을 추가해 더 높은 등급의 영화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감독판'은 결국 자신의 의도를 조금 더 만족스럽게 담아내기 위한 창작자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야심 많은 감독들에게 만족의 끝이 있을까 싶기는 하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의미의 '감독판'은 아마 죽는 날까지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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