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도 피해간 곳 별 헤는 왕곡마을

2021. 5. 1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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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국 앵커 ▶

해금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강원도 고성에는 특별한 민속 마을이 있답니다.

◀ 차미연 앵커 ▶

바로 왕곡마을이란 곳인데요,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고 하네요.

◀ 김필국 앵커 ▶

남한에선 유일하게 북방식 가옥형태가 남아있고, 그래서 시인 윤동주의 일생을 다룬 영화 동주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는데요.

◀ 차미연 앵커 ▶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지금도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남북접경지역 이 산골 마을을 이상현 기자가 찾아가봤습니다.

◀ 리포트 ▶

북녘의 금강산 일만이천봉 가운데 마지막 봉우리라는 구선봉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바로 앞으로는 선녀와 나뭇군 전설이 서려있는 감호가, 오른쪽으로는 바다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금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북한과 맞닿아있는 남한 최북단 지역, 강원도 고성군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풍경입니다.

한국전쟁 전엔 북한에 속해 김일성 별장까지 남아있는 38선 이북의 땅.

그 땅 깊은 산속에,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시간이 멈춘 곳으로 불리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다섯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왕성하게 계곡을 이룬다 해서 이름붙여진 오봉리 왕곡마을.

안동 하회마을, 제주 성읍마을같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국의 7개 민속마을중 하나로, 조선초기에 형성됐고 지금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북방식 가옥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입니다.

[김세준/왕곡마을 보존회장] "국내에선 유일하게 북방식이 여기밖에 없어..저기 남쪽으로 가면 내가 민속마을은 빼놓지 않고 다 가봤는데요, 제주 성읍마을에서부터 양동, 안동, 성주군 한개리, 무섬, 외암 다 가봤는데 거긴 건축양식이 이렇지 않아 여기하고 전혀 틀려요."

단층의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섞여있는 고즈넉한 마을.

[이상현 기자/통일전망대] "제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왕곡마을 입구입니다. 전통마을답게 이렇게 그네도 마을 초입부터 마련돼 있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마을 구석구석을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골짜기 마을답게 마을 중앙엔 개울이 흐르고, 그 양편으로, 바람과 눈이 많은 관북지방, 함경도식 가옥들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2백년정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ㄱ자 모양의 집들로, 햇볕을 충분히 받고 쌓인눈으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고자 앞쪽엔 담장과 대문이 없는 개방형 마당구조를 취했습니다.

대문은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대신합니다.

[조효선/왕곡마을 문화해설사] "이렇게 보시면 ㄱ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집안에 부엌과 외양간이 공존하고 있어요. 같이 있는 이런 형태의 구조가 북방식 가옥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난데요, 여기 대문을 열면 바로 부엌하고 외양간이 나옵니다. 저 작은 문은 예전에는 소들이 드나드는 문이 되겠죠."

추운 지방인만큼 외양간과 부엌이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건데요, 부엌 옆으론 바로 마루가 이어집니다.

또 안방과 안방에 딸린 골방 그리고 사랑방이 한 건물내에서 통해 있는 북방식 겹집 구조로, 방마다 난방용 아궁이를 따로 쓰는 남방식 홑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방적인 앞마당과는 달리 뒷마당은 차가운 북서풍을 막기 위해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고 열 손실을 막기 위해 굴뚝엔 항아리를 엎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북방식 가옥구조가 온전히 보존돼있어서 함경도 바로 위인 만주 북간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시인 윤동주의 일생을 다룬 영화 '동주'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 동주가 친구와 아지트로 썼던 공간은 실제론 이 마을의 방앗간이었는데요, 이 역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방앗간 옆집에서 만난 80대 할아버지.

아직도 12살, 북한 인민학교 5학년이었던 6.25 당시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함병식(83세)] "이 골짜기로 비행기로 폭격을 (못했어요) 그때 비행기는 못했어요. 지금 것은 하지만 (그렇죠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까) 그렇지, 근데 이 골짜기로 불빛을 보고 함포 알을 쐈는데 그 방앗간 주춧돌 밑에 와서 끄트머리가 부러지면서 안 터졌어요. (아 불발탄이었군요?) 이 부락이 3발이 들어왔어요 그게, 근데 하나도 안 터졌어요."

전란을 피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마을이지만 세월이 흐르며 이 마을의 젊은이들 역시 도시로 도시로 모두 떠나갔고, 현재는 가옥 쉰채중 절반 정도가 비어 있다고 합니다.

남은 주민들은 홀로 사는 칠팔십대 노인 20여명이 대부분인데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쪽의 한 기와집에선 80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꽃다운 스무살이었던 한국전쟁 직후, 옆마을에서 이곳으로 시집온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왔다는데요.

아니다 다를까 마당 곳곳엔 1년간 불을 때고도 남을만한 양의 장작이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어순복(88세)] "그래도 추운걸 몰라 맨날 뜨뜻하니까. 날로(매일) 때면 이 돌(온돌)이 달아서 안 식어. 난 탄불(연탄불)에 가선 못살겠데요, (보일러) 조금 돌려놓으면 금방 추워가지고 무슨..이건 아침에 불때면 내일 아침에도 뜨끈뜨끈한데, 그래서 또 나와 때지."

남편은 하늘나라로, 자식들은 도시로 다 떠나갔지만 홀로 텃밭을 가꾸며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곳의 시간은 이렇게 과거에 멈춰 있었고, 그 덕분에 오히려 관광객 발걸음은 조금씩 늘고 있다는데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세상을 등지게 될 훗날에도 여전히 이 마을의 매력을 보존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함명준/고성군수] "여러가지 트래킹이든 뭐든 자전거도로 등 이런걸 통해서 마을로 들어와서 감성어린 이 마을의 느낌을 가지고 나갈 수 있게 그렇게 하다보면 소득과 연계가 되고 (마을이) 활성화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정적을 깨우는 졸졸졸 개울소리를 벗삼아, 영화속 동주처럼 수없이 쏟아지는 별을 헤게 되는 밤.

여명과 함께, 살랑살랑 봄바람과 지저귀는 새소리에, 기분좋게 잠을 깨게 되는 새벽.

이렇게 수백년을 관통해온 이 남북 접경지역의 산골마을은 오랜 시간 한반도 남북의 자연과 문화를 지켜냈고 이젠 또다른 백년, 또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통일전망대 이상현입니다.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replay/unity/6179600_291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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