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사라지니 재래시장 부활? 울 엄마 일자리만 사라졌다

권승준 기자 입력 2021. 5. 15. 03:02 수정 2021. 5. 1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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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유일한 대형마트 없어진 경기도 구리시를 가보니
지난 12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유통 단지 건물 내부(왼쪽 사진). 구리 유일의 대형 마트였던 롯데마트가 입점해 있던 때는 매일 수천 명이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지난달 롯데마트가 철수한 뒤로는 사람들 발길이 뚝 끊겼다. /양수열 영상미디어기자

“우리 동네 대형 마트가 사라졌다!”

경기도 구리시 얘기다. 약 20만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서 유일한 대형 마트였던 롯데마트 구리점이 지난달 20일 문을 닫았다. 구리시와 마트 건물의 임대차 계약 연장이 불발된 탓이다. 구리시는 올해 초 롯데마트 측에 연간 임대료로 47억원을 요구했다. 롯데가 “종전 임대료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라며 거부하자, 시는 해당 건물 임대 계약을 경쟁 입찰에 부쳤다. 4차까지도 입찰에 응한 업체가 없었다. 임대료는 30억원대로 내려갔지만 롯데는 관망했다. 구리시 관계자는 “롯데에선 20억원대로 내려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런데 5차 입찰에서 다크호스가 나타났다. 경기 시흥·안산 지역을 중심으로 식자재 마트를 운영하는 중소 유통업체 엘마트가 입찰에 뛰어들어 계약까지 따낸 것. 엘마트는 다음 달부터 영업을 개시할 계획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남양주시의 이마트 다산점은 지난달 10일 큰불이 나 휴업 중이다. 졸지에 구리 시민들은 최소 한 달 넘는 동안 생활권에 대형 마트 하나 없이 살게 됐다.

1993년 이마트 창동점이 문을 연 이래 대형 마트는 한국인들의 소비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대형 마트는 재래시장 등 골목 상권을 초토화한다는 비판 때문에 각종 규제에 발이 묶였다. 최근엔 코로나 사태 등에 따른 온라인 쇼핑몰의 파상 공세로 입지가 급속히 좁아지는 중이다. 대형 마트가 사라지면 재래시장이 부활할까? 온라인 쇼핑이 일상을 점령할까? ‘아무튼, 주말’이 구리시를 찾았다.

①소비자: 주말 나들이 장소가 사라졌다

지난 10일 롯데마트가 입점해있던 구리시 인창동 상가 건물은 내부 공사에 한창이었다. 건물 곳곳에 “엘마트 입점사 모집” “병원·치과 정상 영업 중”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붙어있을 뿐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롯데마트가 있을 땐 매일 유동 인구만 수천 명이던 지역의 중심지였다. 택시 기사 조영진씨는 “주말이고 주중이고 마트 오가는 손님 모시면서 번 돈만 한 달에 수십만 원은 될 것”이라며 “어디든 좋으니 큰 마트가 다시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마트가 없으니 쿠팡 같은 온라인 쇼핑몰 소비가 늘어나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 직장인 조영주씨는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 고르고 주문하고 물건 받아 정리하는 게 전부 내 몫이라 오히려 집안일이 늘어났다”며 “마트가 있을 땐 남편보고 장을 봐 오라고 시킬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니 가사 분담이 안 된다”고 했다. 마트 인근 한 아파트 단지의 관리소장은 “택배 급증으로 매주 쓰레기 배출량이 2배 이상 늘고 제대로 분리하지 않은 쓰레기도 많아져 골치 아프다”고 했다.

롯데마트와 함께 지역 상권을 양분하는 구리전통시장 상인들 역시 “마트가 사라졌다고 특별히 매출이 올라가진 않았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기자

롯데마트 폐점은 단순히 장 보러 갈 곳이 사라졌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파트 밀집 단지인 인창동·교문2동 일대에서 만난 주민들은 “마트가 사라지면서 놀러 갈 곳이 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요즘의 대형 마트와 백화점은 가족이나 연인들이 외식이나 데이트, 쇼핑, 나들이 등 여러 목적으로 찾는 일종의 복합 쇼핑몰처럼 진화 중이기 때문이다. 유주영씨는 “주말에 느지막이 일어나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마트만 가도 놀이공원에 간 것처럼 시간을 보낼 순 있었다”며 “엘마트는 식자재 마트라서 그런 즐길거리는 없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②지역 상권: 낙수 효과가 사라졌다

“마트가 있으나 없으나 매출은 똑같아요. 코로나가 더 문제지.”

이날 구리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구리전통시장에서 만난 15점포 상인 중에 롯데마트 폐점 후 매출이 늘어났다고 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구리시장 상인회 관계자는 “평일은 몰라도 주말에 유입되는 손님은 확실이 늘어난 것을 체감할 수 있지만 매출로 연결되지는 않는 듯하다”며 “대형 마트보단 온라인 쇼핑몰 쪽에 수요를 뺏긴 타격이 더 크다”고 말했다.

롯데마트 대신 중소 업체인 엘마트가 들어오는 걸 우려하는 상인도 있었다. 시장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 중인 한 상인은 “엘마트는 주력 품목이나 가격대가 재래시장과 비슷하다고 들었다”며 “롯데마트는 대기업이고 여기서 20년 넘게 영업해서 시장 상인들의 요구를 많이 들어준 편인데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엘마트도 그렇게 해줄진 모르겠다”고 말했다.

롯데마트 폐점으로 매출 감소를 호소하는 상인도 많았다. 대형 마트 손님들이 다른 곳까지 들르면서 생기는 이른바 ‘낙수 효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롯데마트와 같은 건물에 있는 축산물 도매시장 상인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이모씨는 “주말이면 마트에 놀러 온 사람들이 고기를 한 아름씩 떼 가는 매출이 컸는데 그게 완전히 사라져 이번 달은 너무 힘들다”며 “엘마트는 식자재 마트라서 나들이하듯 놀러 오는 손님이 많이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대형 마트와 지역 상인의 상생 관계는 실제 연구로도 입증된다. 경기과학기술대 조춘한 교수가 지난달 공개한 ‘전통시장 이용 고객 변화’ 연구에 따르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복합 쇼핑몰 스타필드와 인근 원당전통시장이 대표적 사례다. 2017년 8월 스타필드 고양점이 생긴 후 원당전통시장 이용 고객은 전보다 3.41% 증가했고 점포당 매출은 7.5%가량 늘었다. 지난 2월 서울 여의도에서 개점한 현대백화점도 비슷한 사례다. 이 백화점은 기존 점포와 달리 마치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외관과 다양한 볼거리로 손님을 모았다. 이렇게 유입된 손님들이 주변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하철 역으로 연결된 IFC몰의 전년 같은 달 대비 방문자가 32%가량 늘어난 것이 단적인 예다.

③노동자: 엄마 일자리가 사라졌다

소비자나 상인들과 달리 대형 마트 폐점의 직격탄을 맞은 건 노동자들이었다. 이전까지 롯데마트에 고용돼 일하던 정규직 노동자 150여 명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구리시에 따르면 엘마트는 임대 계약을 맺으며 롯데마트 직원 중 구리에 거주하는 149명은 희망할 경우 고용을 승계하겠다고 합의했다. 하지만 이번 달엔 실업자로 지내야 하고, 엘마트 재취업을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롯데마트에서 일했던 A씨는 “그래도 대기업이었던 롯데에 비하면 엘마트는 급여나 복지 혜택이 많이 떨어질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대형마트 폐점은 여성에게 더 불리하다. 마트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롯데마트에서 일했던 또 다른 직원은 “마트 직원 중엔 자녀 학원비를 벌려고 온 엄마가 많았다”며 “그런 엄마들이 힘도 많이 들고 근무도 불규칙한 쿠팡 택배 기사가 될 순 없으니 갈 곳은 식당이나 편의점 알바뿐”이라고 했다.

코로나 사태로 여성 노동자들이 피해를 더 많이 본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난 6일 한국은행 고용분석팀이 발표한 ‘코로나19와 여성 고용’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확산 이후 여성 취업자 수는 최고 5.4% 감소해 남성(2.4%)보다 감소 폭이 두 배 이상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여성 고용 비율이 높은 대면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고용이 크게 감소했는데, 큰 타격을 받은 대표적 업종 중 하나가 대형 마트다. 실제로 롯데마트는 작년 구조조정 등으로 통해 전국에서 12점포를 정리했고, 올해도 구리점을 시작으로 10곳 안팎을 더 정리할 계획이다.

조춘한 교수는 “대형 마트는 이제 단순히 장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양질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 주민들의 나들이나 만남 장소도 되는 일종의 ‘여가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이런 대형 마트를 규제 대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하는 다양한 역할까지 고려해 지역 상권에 활력을 줄 정책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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