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총수가 고릴라 인형과 티격태격? 용진이형은 왜 저럴까

김미리 기자 2021. 5.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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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래퍼처럼 도발·저격까지.. 정용진의 'YJ리더십'

“지난 주말은 #현판(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배카점데이(백화점 데이).” 20대 여성의 쇼핑 인증이 아니다. 지난 10일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53)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생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생 ‘Z세대’ 통칭)식 말 줄임에 맞춤법 파괴, 게다가 인증 장소는 경쟁 업체다.

SSG랜더스 구단주가 된 이후엔 경쟁사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향해 “동빈이 형은 원래 야구에 관심이 없던 형”이라고 도발하고, 자신을 빼닮은 신세계푸드 캐릭터 ‘제이릴라’에겐 “짜증 나는 고릴라 X끼”라고 욕설까지 섞어 티격태격한다.

경쟁사 ‘저격’, 자기 비하, 부캐(부캐릭터) 놀이…. 여태 이런 재벌은 없었다. 재계의 럭비공이랄까. 어디로 튈지 모른다. 눈살 찌푸리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용진이 형’에게 환호하는 팬덤이 더 강력해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전문가들과 함께 ‘YJ(’용진’의 영어 약자) 리더십'을 분석해봤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신세계푸드의 고릴라 캐릭터 ‘제이릴라’(왼쪽)에게 짜증 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 제이릴라는 정 부회장을 본떠 만든 ‘부캐(부캐릭터)’로 알려졌지만 그는 극구 닮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인스타그램

◇재계 럭비공? … ‘대인배’ 마케팅

소셜미디어 구력(球歷)으로 치자면 재계 수위를 다툰다. 2010년 경영 일선에 등장했을 때부터 트위터를 적극 이용했다. 이후 페이스북으로 옮겨 갔다가 2015년 즈음 인스타그램에 정착했다. 팔로어는 웬만한 연예인보다도 많은 63만여 명. 가천대 경영학부 조성준 교수는 “10년 넘게 소셜미디어로 소통하는 사이 2010년 문용식 나우콤 대표와 벌인 ‘이마트 피자’ 설전, 트위터 해킹 사건 등 시행착오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적정선’과 노하우를 체득한 것 같다. 즉흥적 게시물처럼 보이지만 마케팅 전략과 메시지를 담는다”고 분석했다. 래퍼들이 계산된 라임(각운)에 가사를 얹어 쏟아내듯 정 부회장이 막 던지는 듯한 코멘트에도 계산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최근 두드러지는 행보는 경쟁 업체 방문이다. 지난 2월 문 연 여의도 ‘더현대서울’을 방문해 인증샷을 남기기도 했다. 적진에 뛰어들어 굳이 라이벌 업체를 홍보해준 이유가 뭘까. 정동일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20~30대의 ‘열린 소비자’ 특성을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MZ세대는 특정 브랜드나 기업에 갇혀 있지 않고 좋은 플랫폼이 나타나면 주저 없이 이동한다. 그들에게 우리 회사는 경쟁 업체도 포용하고,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끊임없이 조사하는 ‘대인배’이자 ‘열린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려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배타적 한국 기업 문화에선 특이한 풍경이다. 정 교수는 “일례로 녹차를 만드는 모 기업에 강의하러 갔더니 강의장에 커피가 없더라. 가전 회사 직원도 경쟁사 제품 사용은 금기다. 다른 제품도 열심히 관찰하면서 변화가 어디에서 올지 생각해야 하는데 ‘꼰대'처럼 닫혀 있다. 국내 기업이 대체로 그렇다”고 했다. HSG 휴먼솔루션그룹 최철규 대표는 경쟁 회사 오너를 향한 도발도 ‘열린 자세’로 해석했다. “기성세대 시선에선 불편할지 몰라도 젊은 세대는 금기, 권위를 깨는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즉흥적 ‘디스(비하)’와 도발을 유희로 삼는 힙합의 스웨그(멋을 가리키는 은어)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경쟁업체 ‘더현대’방문 인증샷. /인스타그램

◇계산된 만만함... ‘현명한 광대’ 리더십

“YJ랑 하나도 안 닮음.” 최근 화제가 된 ‘제이릴라’ 캐릭터에 대해 정 부회장은 자신의 ‘부캐’설을 적극 부인하며 귀찮아한다. 그럴수록 대중은 권위마저 놀이로 승화시킨 기업 총수에게 열광한다.

리더십 전문가인 김현정 숭실대 겸임교수는 “요즘 주목받는 현명한 광대(wise fool)형 리더십”이라고 했다. ‘현명한 광대 리더십’은 세계적 경영학 석학인 맨프레드 케츠 드 브리스 인시아드 교수가 주창한 개념. 일부러 자신의 부족함과 만만함을 드러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리더를 말한다. ‘내가 제일 잘났어’ 하는 태도로 조직원을 주눅 들게 하는 ‘카리스마형 리더’와 상반된 개념이다. 최철규 대표도 “전지전능한 ‘철인형 리더’는 이제 종말을 맞았다. 리더가 다 알고 결정하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다단해졌다. 리더가 ‘무지의 제왕(master of I don’t know)’으로 자신을 포지셔닝(자리매김)해 구성원들이 기를 펴게 하는 게 요즘 추세”라고 했다.

신세계에선 공식적으로 제이릴라가 정 부회장을 본떠 만든 캐릭터라고 밝히진 않았다. 하지만 정 부회장이 ‘자기 희화화’를 용인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캐릭터란 걸 대중은 안다. 김현정 교수는 “리더가 기꺼이 망가지고 스스로 낮춤으로써 마케팅 효과를 올리는 똑똑한 전략”이라고 했다. 그가 작년 말 출연한 이마트 유튜브 채널의 홍보 영상도 일맥상통한다. 영상에서 정 부회장이 밭에서 배추를 뽑아 들며 말한다. “어우 그놈 실하다.” 소비자는 실한 것이 배추인지, 정 부회장인지 헷갈리며 배꼽 잡았다.

지난해 말 이마트 유튜브의 기업 홍보 영상에 등장해 배추를 뽑아 든 정 부회장. 아래로 ‘어우 그놈 실하다’는 자막이 보인다. /이마트 유튜브

김 교수는 “요즘 2030은 물건 파는 사람이 ‘에헴’ 하면 바로 비호감으로 찍어 버린다. 그래서 자칫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lovability(강한 매력)’보다는 ‘likability(느슨한 호감)’가 중요한 마케팅의 키워드다. 제이릴라와 정용진의 궁합도 재미있는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마치 ‘펭수’가 EBS 김명중 사장을 친근하게 부르면서 EBS의 딱딱한 이미지를 바꾼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옅은 ‘아버지 그늘’, 운신의 폭 넓어

자기 희화화와 유머는 자신감과 여유가 없으면 나올 수 없다. 재벌이면서도 모계의 가업을 잇는다는 지점에서 이유를 찾는 시각도 있다. 정 부회장은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아들이다.

김현정 교수는 “대부분의 재벌 2,3세에겐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다”며 “정 부회장은 범삼성가이지만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이 작다. 그만큼 경직돼 있지 않다”고 했다. 경복고·서울대(이재용은 동양사학과, 정용진은 서양사학과 1학년 중퇴) 동창인 동갑내기 외사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비해 대중 시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그 때문이다. 조영호 아주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범삼성 계열 기업들이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처럼 치밀하고 체계적이지만 인간미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그늘이 옅은 정 부회장은 운신 폭이 넓어 자유롭고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로 이런 선입견을 깨는 듯하다”고 평했다.

정 부회장의 아버지는 엔지니어 출신으로 삼성전자 사장을 지낸 정재은(82) 신세계 명예회장. 지난 2006년 67세 나이로 국내 첫 우주인 선발에 지원해 화제가 됐다. 당시 밝힌 도전 이유는 “우주에 올라가서 실제 우주정거장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서”였다. 정 부회장의 괴짜 근성과 모험심을 부전자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척'은 안 통해... 사생활까지 던진 진정성

최재붕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는 “MZ세대는 ‘가식’과 ‘하는 척’을 혐오한다”며 “정 부회장이 상대 저격, 비속어까지 쓰는 것은 잠재적 고객으로 생각하는 MZ세대의 문화 코드에 맞춰 그들 세계 안에서 살면서 ‘찐(진짜)’으로 인정받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3호’ ‘4호’로 부르며 어린 자녀 얼굴까지 공개하는 등 재벌가에선 이례적으로 사생활까지 노출한다. 최 교수는 “총수 처지에서 기업의 미래와 내가 만들어내는 팬덤이 일치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팬덤은 한번 배신하면 무서운 적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며 “어쩌면 정 부회장으로선 인생을 걸고 하는 행위일지 모른다”고 했다. 정 부회장은 인스타그램의 지난 게시물을 정기적으로 지워 20~30여 건만 둔다. 노출하되 지속적으로 구설에 얽히지는 않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소셜미디어 소통을 많이 하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도 종종 비교된다. 정동일 교수는 “둘 다 감각적인 면을 부각하는데, 정태영 부회장은 텍스트가 강조되는 페이스북에서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를 써 지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정용진 부회장은 인스타그램에서 무게감을 걷어내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프리스타일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트렌드를 빨리 포착해 적극적으로 신사업에 뛰어드는 경영 스타일엔 리스크도 따른다. 스타벅스, 트레이더스처럼 히트작도 냈지만, 부츠, PK피코크, 제주 소주, 삐에로쇼핑 등은 접었다. 최근 1~2년 간 수익성 위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과감히 정리한 결과, 올 1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1232억원으로 3년 만에 1000억원을 넘겼다. 하지만 유통 산업 구조가 급변하고 있어 장밋빛 미래를 장담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최철규 대표는 “회사는 법인(法人)이다. 말 그대로 회사 자체의 인격이 있다. 너무 CEO 개인 성향이 강조돼 ‘신세계=정용진’이 되면 사업이 잘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실적이 안 좋으면 위험하다. 기업의 영속성 관점에서는 개인 색깔을 서서히 빼고 법인 색깔을 강화해야 한다. 이 시점을 잘 조율하는 일이 50대 중반인 정 부회장에겐 중요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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