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구름처럼 가볍고 바삭한 이 맛.. 근육질 노동자들의 음식이었다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1. 5.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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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의 pick] 피시 앤드 칩스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는 그 자체가 영국이고 영국의 역사다. 간단히 말해 생선과 감자튀김인 이 요리는 기원을 따지면 1800년대로 올라간다. 영국 인근에서 (당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히던 대구와 영국인들이 쌀처럼 먹는 감자를 썼으니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일 만하다.

피시 앤드 칩스는 산업혁명과도 궤를 같이한다. 산업혁명과 함께 목화를 짜고 남은 목화씨에서 뽑은 면실유가 미국에서 대량생산됐다. 이 기름에 튀긴 피시 앤드 칩스를 허기진 영국 노동자들이 사서 먹으며 철도로 통근했다. 매주 금요일, 종이에 둘둘 싼 피시 앤드 칩스에 맥아로 만든 식초를 뿌려 먹는 것은 이제 영국의 전통이 되었다.

서울 신사동 ‘돼장’의 피시 앤드 칩스(앞)와 돼장 한판 모둠 세트.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조리 자체만 보면 피시 앤드 칩스는 만들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의외로 제대로 내는 곳이 드물다. 이 단순한 음식이 가진 미묘한 포인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이태원 ‘로즈앤크라운’에서 내놓는 피시 앤드 칩스는 원형에 가깝다. 해밀톤 호텔 뒤 언덕에 자리한 이 집에 들어서자 영국 펍 특유의 시큰한 냄새가 코 깊숙이 들어왔다. 동그랗고 높은 의자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거의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마스크를 쓴 종업원이 신중하게 따른 맥주에는 정확한 비율로 거품이 떴다. 피시 앤드 칩스는 물 대신 맥주를 써서 튀김옷이 가벼웠고 따로 빵가루를 입히지 않아 겉이 매끈했다. 튀김을 포크로 툭 건드려보면 속이 빈 듯 가벼운 소리가 났다. 하얀 생선살의 무던한 단맛은 씹을수록 맛이 났다.

고추와 마늘을 넣어 매콤하게 맛을 낸 식초를 튀김에 뿌렸다. 소금과 후추도 조금 더 쳤다. 영국 바깥에서는 질색하는 영국 사람들의 피시 앤드 칩스 먹는 방식이다. 식초에 절어 튀김옷이 눅눅해지기 전 빠르게 튀김을 입에 넣었다. 살짝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런던 프라이드’ 맥주를 뒤이어 마셨다. 지긋하게 위장을 누르는 포만감이 들었다.

한남대교를 건너 강남으로 자리를 옮기면 언주역 뒤편에 ‘올드캡’이 있다. 포장과 배달만 하는 이 집은 피시 앤드 칩스, 피시버거, 햄버거 등을 주력으로 한다. 작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햄버거 번까지 직접 굽는다.

먼저 피시버거(fish burger)를 입에 넣었다. 로메인상추, 양상추, 할라피뇨가 아삭하고 상큼한 역할을 했다. 한입 크게 베어 물자 고기를 쓴 햄버거와 다른 맛이 다가왔다. 기름기를 무기 삼아 길게 늘어지는 느낌이 없었다. 대신 채소와 생선이 어우러져 시작과 끝이 명확한 단편소설을 읽는 듯한 쾌감이 들었다.

피시 앤드 칩스는 엄연히 말해 전통 영국식은 아니었다. 주인장의 설명을 들으니 처음 호주에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전통에 가까웠으나 한국 사람 입맛에 맞춰 조리법을 바꿨다고 했다. 생선 튀김은 튀김옷을 얇게 입히고 그 위에 빵가루를 묻혀 가볍고 바삭한 맛을 만들었다. 마요네즈에 피클 등을 섞어 만든 타르타르 소스를 곁들였다. 담백한 생선살이 얌전히 이에 씹혔다. 황금빛으로 익힌 감자튀김은 과하게 익혀 겉이 딱딱하거나 덜 튀겨서 눅눅하지 않았다. 대신 먹을 때마다 라켓에 맞고 쭉 뻗어가는 테니스공처럼 맑은 타격음이 들렸다. 소파에 등을 기대 누워 축구 경기를 보고 싶어졌다.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가면 ‘돼장’이라는 집이 있다. 돼지와 장어를 합성해 이름을 지은 이곳은 말 그대로 돼지와 붕장어를 판다. 돼지머리에 장어 꼬리를 한 상상의 동물을 간판으로 썼는데 그 모습이 옛날 해태나 용을 보는 듯 친근감이 들었다. 돼지는 충남 예산에서 사과를 먹여 키웠고 붕장어는 통영산(産)으로 2.5kg 이상 되는 것만 쓴다고 했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무쇠 철판이 상에 올라왔다. 직원은 철판 초벌을 거친 장어와 돼지 목살을 뜨겁게 달군 철판 위에 놓았다. 장어는 육질이 탄탄했다. 돼지 목살은 느끼하기보다 고소한 기름 맛을 지녔다.

바다와 육지의 맛을 함께 낸다는 이 집의 콘셉트에 걸맞게 피시 앤드 칩스도 메뉴에 올랐다. 흰살 생선 대신 장어를, 감자 대신 가지를 사용한 피시 앤드 칩스를 낸다. 오징어 먹물을 써서 검정빛으로 튀겨낸 장어와 가지에 유자 타르타르 소스를 함께 냈다.

구름처럼 가볍게 부풀어 오른 튀김옷이 한낮의 꿈처럼 부서졌다. 튀김옷 속 장어는 담백했고 열기를 품은 가지는 단맛을 냈다. 유자 타르타르 소스는 레몬과 달리 향이 달콤했다. 포크를 들고 튀김을 큼지막하게 잘라 입에 넣었다. 하나 둘 하나 둘 부지런히 걷듯 장어와 가지를 번갈아 가며 먹었다. 바다와 육지의 에센스만 모아놓은 듯 먹을수록 힘이 났다.

그때쯤 알게 되는 것은 피시 앤드 칩스의 묘미다. 최고의 열량을 내기 위해 가용 가능한 자원을 끌어 모아 간결하게 조리한 효율성.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복잡함을 제거한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가벼운 말 대신 울퉁불퉁한 근육을 써서 세상을 살던 이들의 음식이었다.

#로즈앤크라운: 피시 앤드 칩스 1만4900원, 코티지파이 9900원.

#올드캡: 피시 앤드 칩스 1만900원, 피시버거 5900원.

#돼장: 피시 앤드 칩스 2만5000원, 돼지목살구이 3만5000원(300g), 붕장어구이 2만9000원(20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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