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영어 부러운가요? "샌드위치 발음부터 해보세요"

남정미 기자 2021. 5.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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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영어는 대체 왜?..' 펴낸
서강대 채서영 교수
지난 11일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채서영 교수는 돌발성 난청과 어지럼증으로 2010년과 2012년 두 번 쓰러져 한쪽 귀의 평형감각을 잃고 청력도 반쯤 잃었다. “학문이 많은 사람에게 쓸모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쓰게 됐다”는 채 교수는 남편인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얘기는 가급적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고상한 척하는(snobbish)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았네요.”

지난달 11일 열린 영국 아카데미(BAFTA)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의 수상 소감이 영국인들을 포복절도하게 했다. ‘Snobbish’는 ‘잘난 척한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형용사. 윤여정은 각종 시상식과 인터뷰에서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 화법에 유머를 더해 좌중을 사로잡았다. 그것도 영어로!

서강대 영문과 채서영(57) 교수는 “윤여정 선생님처럼 영어 하자는 게 제 생각”이라고 했다. “‘Snobbish’를 다른 나라 사람을 상대로 썼거나 젊은 사람이 말했으면 자칫 욕먹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영국인들이 냉소적인 농담을 좋아해서 이 말도 농담처럼 즐길 거란 걸 아신 거죠.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맥락까지 정확히 파악했어요. 한국식 발음이 섞여 있지만, 전 세계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고요. 아들들에 대해 ‘Son’ 대신 구어체로 장난스럽게 ‘my boys’라고 표현했지만, 영국 필립 공의 별세에 대해선 ‘condolence(애도)’ 같은 수준 높은 단어도 적절히 섞어 사용하셨죠.”

채 교수는 대학 시절 미국 NBC 서울 지국에서 뉴스 제작 업무를 지원하다가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사회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세계적인 사회언어학자인 윌리엄 라보프(Labov)에게 수학했다. 미국 AT&T 벨연구소의 세계 언어 인지 프로젝트 등에도 참여한 사회언어학 분야의 권위자다.

그가 한 달에도 몇 권씩 ‘토익 만점 받는 법’ 등 영어 실용서가 쏟아지는 출판계에 사회언어학자가 바라보는 영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영어는 대체 왜? 그런가요’(사회평론)다. 최근 불황이라는 출판 시장에서 한 달여 만에 3쇄를 돌파했다. ‘영어 말소리는 왜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영어 문장은 왜 한국말 하듯 만들면 어색한지’ 등을 다양한 상황과 사례를 곁들여 25가지 주제의 현대 영어 원리로 설명한다.

지난 11일 만난 채 교수 연구실에는 기존 출간된 책보다 2배 정도 큰 판형의 책이 놓여 있었다. 60대 이상을 위한 ‘큰 글씨 책’이라고 했다.

‘영어는 대체 왜? 그런가요’ 큰 글씨 책(왼쪽·출간예정)과 원래 크기의 책. 채 교수는 “한국어와 다른 영어의 음절구조, 강세에 따른 모음 변화 등 중고등학교 때 교실에서 배우지 않았던 원리들이 책에 담겨 있다”며 “많은 분이 이런 원리를 통해 같은 노력으로도 효율성이 높아지고 더 쉽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영어도 원리 알아야 길이 보인다

–큰 글씨 책이 왜 필요한가요.

“윤여정 배우 덕분인지, 최근 60~70대분들 중에 영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늘어난 것 같아요. 주위에서도 ‘채 선생, (책의) 글씨가 너무 작아’ 하고 전화가 와요. 그분들 위해 글씨가 큰 책을 새로 준비하고 있어요.”

–처음엔 영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영문과에 들어오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 ‘언어학 개론’입니다.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인데, 3·4학년 때까지 미뤄두는 학생들이 많아요. 수업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죠.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수업을 즐거운 시간으로 여길까, 재밌게 언어학에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점차 저만의 노하우와 강의 내용이 쌓이면서 이를 책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수업 교재가 아니라 대중서로 만드신 이유가 있나요.

“한국인에게 영어는 ‘안 한 숙제' 같잖아요. 영문과 학생들뿐 아니라 회사에서 영어로 고생했던 사람, 아이 영어 교육을 고민하는 엄마 등등 영어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영어에는 어떤 원리가 있나요.

“예전에는 영어 발음 하면 어떤 식으로든 혀를 굴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강세와 그에 따른 모음 변화입니다. 예컨대 한국어는 ‘음절박자언어’라 모든 음절을 비슷한 강도와 길이로 또박또박 발음합니다. ‘샌드위치’처럼요. 영어는 ‘강세박자언어’라 음절보다는 ‘강세’가 말소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1음절에 강세를 두고 샌을 세게 발음해 나머지는 거의 들리지 않죠. 우리가 외국에 가서 ‘샌드위치’라고 얘기하면 미국인들이 잘 못 알아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또 한국어는 ‘할 수 있어’처럼 의미가 통하면 대명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명사생략언어’입니다. 영어는 그렇지 않아요. 맥락을 통해 대명사가 무엇을 가르키는지 알 수 있어도 생략하지 않아요. ‘You can do it’처럼요. 대명사를 잘 써야 영어답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훨씬 효과적으로 영어를 익힐 수 있어요.”

–우리 교육에서는 왜 이런 원리를 잘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오랫동안 영어를 실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학과 취업의 잣대로 썼기 때문이라고 봐요. 이제는 바뀔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이 배우는 언어는 우리의 ‘자원’인 셈인데 이를 어떻게 개발하고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어요. 흔히 영어를 10년 넘게 배웠는데 왜 말을 한마디도 못 하냐고 합니다. 말하기를 10년 배웠다면 당연히 잘해야죠. 그런데 우리가 배운 건 기초적인 단어와 문장 독해 정도예요.”

–교수님은 어떻게 영어를 잘하게 되셨나요.

“저도 중학교 가서야 처음으로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어요. 사이먼 앤드 가펑클, 빌리 조엘 등 팝송을 많이 듣고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 낸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어는 어릴 때 시켜야 잘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언어 능력이 어릴 때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건 맞아요. 어린 시절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살다 오면 언어 측면에서야 좋겠지만, 비용도 많이 들고 경우에 따라선 가족이 헤어져야 하는 등 다른 문제가 있죠.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대학교 부속 유치원을 다녔는데, 불어교육과 학생들이 불어 노래를 가르쳐주며 몇 번 놀아줬어요. 지금 불어는 못하지만, 그 노래는 안 잊어버려요. 그 한 번의 경험이 나중에 외국어를 접할 때 낯설지 않게 해주죠.”

–'외국어 배우기엔 머리가 굳었다'고 하는 성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말을 배울 땐 소리가 먼저입니다. 주변에 사전 한 권 씹어 먹었는데 영어 한마디도 안 나온다는 사람이 있어요. 말할 수 없는 단어는 모르는 단어와 다름없습니다. 실제로 그 단어를 언제 어떻게 쓰는지 귀로 익히고, 따라 해야 내 언어가 될 수 있어요. 영화나 TV 드라마, 아니면 동화라도 자신이 스토리를 대충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 하나를 정해보세요. 그걸 듣고 또 듣다 보면 귀에 들어오는 게 있을 겁니다. 이때 자막은 보면 안 돼요. 영어 소리에 익숙해졌다면, 그다음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해보세요. 학생들에게 권하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연설 잘하는 사람을 하나 정해서 세밀한 발음까지 그대로 흉내 내는 겁니다.”

◇친구 오빠로 만난 SK부회장

채 교수 남편은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이다. 최 부회장 동생이자 채 교수 친구인 최기원 SK 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을 통해 남편을 만났다. 최 이사장과는 ‘초등학교 동기’인데, 워낙 검소해 대학 때까지도 집안이 어떤지 전혀 몰랐단다. 어느 날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자’고 해서 갔다가 최 부회장을 처음 봤다. 1년 뒤 최 부회장에게 따로 연락이 와서 만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채 교수는 국제로터리재단 장학생에 선발돼 미국 유학이 결정된 상태. 그는 “결혼 때문에 내 인생과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학업을 계속했다. “남편은 아버님이 만든 회사를 시숙(최태원 회장)과 함께 이어가는 것이고, 저는 최대한 상관없이 살려고 애썼어요. 저는 그전부터 공부하는 사람이었고, 제 인생을 잘 산다는 건 제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니까요. 아이들 키울 땐 집에 가서 밥 먹이고 책 읽어준 뒤, 재워 놓고 밤에 다시 학교 나와 일하곤 했어요. 기숙사 사는 학생들이 저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요(웃음).”

–책에 대한 가족들 반응은 어떤가요.

“남편은 책에 옛날에 찍었던 사진을 썼더니 ‘이 사진 보고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멀리하라’고 하더군요(웃음). 원고도 몇 번 봐줬는데 ‘좀 더 쉽게 쓰면 좋겠다’고 조언해줬어요. 책 속에 있는 그림은 미술 전공한 딸이 그려줬어요.”

–언어학 중에서도 사회언어학, 특히 호칭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셨더군요.

“영어에서는 직업명이 호칭으로 쓰이는 경우가 아주 적어요. 반대로 한국어는 직장, 직위 호칭과 존칭이 정말 발달했죠. 제가 예전에 칼럼으로 호칭어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이후 받은 이메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에서 반말 때문에 살인이 일어난 경우를 보내주셨는데, 너무 많은 거예요.”

–최근 한국에서도 영어 이름을 부르거나 직위를 간소화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장님을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정말 친구처럼 막 대할 수 있을까요(웃음). 직위 없애고 다 매니저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아랫사람은 최 맨, 윗사람은 최 매니저님이 되잖아요. 그럼에도 언어를 바꾸면 사회도 점차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도를 하면서 우리 스스로 계속 ‘수평적인 소통을 해야겠다’고 상기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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