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의 영화 같은 하루] [18] 갑자기 불을 켜면

황석희 영화 번역가 2021. 5. 15.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Suddenly a light gets turned on
영화 '스포트라이트'

성당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던 성폭력. 복사(服事)로 봉사하던 남자아이들은 몇몇 신부들에게 성폭력을 당해 성인이 돼서까지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하지만 가톨릭 상부까지 개입하여 고발을 막고 피해자들을 회유하고 사제들을 두둔하는 바람에 이들의 악행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피해자들의 상처는 점점 곪아만 간다. 미국의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집중 취재반 스포트라이트 팀은 최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게오건 신부 건을 집중 취재하며 그동안 은폐되어 왔던 가톨릭 내 성폭력의 전말을 알게 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Spotlight∙2015)’의 한 장면이다.

취재가 이어지면서 밝혀진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집중 보도 후 보스턴 내에서만 성직자 249명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했고 피해자 수는 1000명에 달했다. 이후 계속된 조사에서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가톨릭 내 성추행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취재할수록 무력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스포트라이트 팀. 보도 팀장 월터 로빈슨은 오래전 자신에게도 제보가 들어왔으나 가볍게 생각하여 무시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막았더라면, 그때 세상에 밝혔더라면 피해자를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자책하고 서로를 비판하며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 보스턴 글로브의 신임 국장 마티 배런이 입을 뗀다.

“가끔 쉽게 잊지만, 우린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갑니다(Sometimes it’s easy to forget that we spend most of our time stumbling around the dark).”

시끄럽던 보도국에 정적이 흐르고 마티가 말을 잇는다.

“그러다 갑자기 불을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Suddenly a light gets turned on and there’s a fair share of blame to go around).”

그간 캄캄한 길에서 내 발에 채인 것들을 일일이 탓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훤히 밝혀진 길에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